프랑스 폭력시위 동향 및 원인: 북아프리카 이주민 역사와 갈등
<아프리카 위클리>는 최신의 이슈와 동향에 관한 분석 중심의 국내외자료를
선별, 요약정리하여 제공하는 대국민 메일링 서비스입니다.
|
|
|
< 프랑스 폭력시위 동향 및 원인: 북아프리카 이주민 역사와 갈등 >
|
|
|
지난 6월 27일 프랑스 파리 서부에 위치한 외곽도시 낭테르(Nanterre)에서 북아프리카 알제리계 이민자 2세인 17세 소년 나엘 메르주크(Nahel Merzouk)가 교통 검문 중 경찰의 지시에 불응하여 달아나다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경찰은 승용차 운전석에 앉은 나엘에게 총구를 겨눈 채 “머리에 총알이 박힐 것”이라고 협박했고 나엘이 검문에 불응하고 차를 출발시키자 발포했다. 이 장면이 담긴 11초짜리 영상이 확산되면서 분노한 프랑스 시민들은 전국적으로 폭력 시위를 일으켰으며, 이로 인해 건물과 차량이 화염에 휩싸였고 상점들은 약탈당했다. BBC 통신에 따르면 이번 시위로 지난 2주간 프랑스 전국에서 3,700명 이상이 체포되었으며, 이 중 1,600명 이상이 미성년자다. 시위 피해로 인한 보험금 청구액이 약 6.5억 유로(약 9,300억 원)에 달한다. |
|
|
체포 인원 중 약 30%가 미성년자, 시위 참가자의 연령이 평균 17세일 정도로, 청소년들이 많이 가담했다는 것이 이번 시위의 특징이다. 영국 가디언 지(紙)는 “프랑스 내 흑인 또는 북아프리카계 청소년은 국가 정책에서 소외되고 경찰 신원 조회에서 인종 프로파일링을 당하며, 일자리와 교육 시스템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마크롱(Emmanuel Macron) 프랑스 대통령은 현지 시각 기준 6월 30일 대책 회의에서 “스냅챗과 틱톡 등 SNS 플랫폼에서 폭력적 모임을 조직하고 폭력을 모방하는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 일부는 마치 비디오 게임에 도취되어 게임의 행동을 거리에서 재연하는 것 같다”고 발언하며 시위가 과격해진 이유로 SNS와 게임을 지목했다. “부모들은 자녀가 밖에서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집에 잡아두어야 한다”고도 덧붙였으며 이어 4일에는 “상황이 통제 불능 상태가 되면 SNS를 규제하거나 차단해야 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마크롱의 SNS 차단 가능성을 언급한 발언은 민주주의에 역행한다는 야권의 비난을 비롯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이에 올리비에 베랑(Olivier Veran) 프랑스 정부 대변인은 “대통령의 발언은 이용자들이 특정 장소에 모일 수 있도록 하는 위치도구(GPS) 등 일부 기능 차단을 말한 것”이라고 해명하기도 하였다.
시위대는 프랑스 사회에서 자신들이 인정받지 못한다는 불만을 표출하며 상점 뿐 아니라 경찰서, 소방서, 시청, 도서관 등의 공공기관을 공격했다. 파리 남부도시 라이레로즈(L’Hay-les-Roses)에서는 7월 2일 오전 시위대가 뱅상 장브룅(Vincent Jeanbrun) 시장 집에 차를 몰고 돌진하여 불이 나면서 대피하던 시장 부인의 다리가 부러지고 자녀가 다치는 사건도 발생했다.
시위대의 공격 대상이 된 공공기관은 이민자 차별을 방조하는 프랑스 국가 시스템 자체를 상징한다. 그 중에서도 학교와 도서관이 집중 공격을 받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교육기관은 교육과 문화의 혜택을 제공하여 계층의 사다리 역할을 하는 장소인데, 이러한 기관을 공격한 것은 현재 교육과 문화의 혜택이 프랑스 주류사회에 편중되고 있어 ‘그들만의 세상’에 불만을 표하기 위함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프랑스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인 동부 메츠(Metz)의 보흐니(Borny)에 위치한 도서관에서는 이번 시위로 11만 권 이상의 책과 문서가 훼손되었다. 2005년 이민자 청소년들과 경찰이 충돌한 폭력사태 때도 전국에서 20개 이상의 도서관이 불탔다.*
*2005년 파리 교외 폭동: 2005년 10월 27일 파리 북쪽 근교 클리쉬-수-부아(Clichy-sous-Bois) 지역에 살고 있던 모리타니아 출신 부나 트라오레(15)와 튀니지 출신 지에드 베나(17)가 경찰 검문을 피해 변전소 담을 넘다가 감전사하였다. 이를 계기로 약 3주간 프랑스 전역에서 이민자들의 시위가 지속되었으며 4,728명이 체포되고 경찰 224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차량 10,346대가 불타고 건물 307채가 불타거나 파괴되었다. 이에 따른 지급 보험료는 약 2.4억 유로에 달했다.
프랑스 정부는 시위대를 “폭도“와 “깡패“라 부르며 강경 진압 중이지만 전문가들은 이번 시위가 ‘프랑스 사회가 구조적 차별에 눈감아왔고 공화국의 가치인 자유·평등·박애는 프랑스에서 태어난 백인들만 온전히 누릴 수 있으며 유색인종, 이민자, 빈민에게는 적용되는 현실’을 폭로했으며, 구조적 차별을 해결하는 것이 근본적 해법이라고 분석한다. 즉 이번 사태가 확대된 것은 ‘관용’(Tolerance)을 표방하면서도 아프리카계 이주민을 차별한 프랑스 정부에 대한 억눌린 분노가 터져 나온 것이라는 지적이다. |
|
|
2022년 기준 프랑스 내 이민자는 700만 명으로 프랑스 인구의 10.3%에 해당하며, 이 중 48.2%가 아프리카 태생이고, 그 중에서도 29.1%가 마그레브(Magreb)* 지역 출신이다(알제리 12.5%, 모로코 11.9%, 튀니지 4.7%). 언제부터 이렇게 많은 마그레브 지역 이민자들이 프랑스 사회로 편입된 것일까?
*'서방'을 의미하는 아랍어로, 이슬람 세계의 서단에 해당하는 북아프리카 일대를 총칭한다.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등이 속한다.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프랑스로의 대규모 이주는 프랑스의 식민지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는 19세기부터 북아프리카, 중서부 아프리카 지역에 집중적으로 많은 식민지를 보유하였는데 프랑스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북아프리카에서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 당시 약 30만 명의 병사가 프랑스에 징집되었고 전쟁 이후 일부는 프랑스에 잔류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프랑스가 3,900만 인구 중 약 600만 명(사망자 170만, 부상자 427만)의 노동력을 상실하자, 경제 재건을 위해 프랑스는 주변 유럽 국가 위주로 이민자를 수용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7년 유럽부흥계획(European Recovery Program)*으로 프랑스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지게 됨에 따라 이민을 활성화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는 이탈리아, 폴란드, 벨기에, 스페인 등 주변 유럽국가 출신 이민자를 수용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이웃 유럽 국가로부터 노동력 공급이 충분하지 않아 모로코와 알제리를 중심으로 북아프리카로부터 이민자를 수용하였다.
*조지 마셜(George Marchall) 미국 전 국무장관이 제안한 계획으로 제안자의 이름을 따 마셜플랜으로 불리며, 소련 등 공산권 국가의 팽창 정책을 막기 위해 서유럽 국가들에 진행된 대규모 재정적 지원을 뜻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948년부터 1951년까지 서유럽 재건에 약 140조 원을 투입하였고 이 지원으로 서유럽 국가의 경제 성장률은 프랑스 17%, 이탈리아 25%, 서독 41%를 기록하였다.
당시 전쟁으로 프랑스가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 식민지 유지에 필요한 자원이 부족해지면서, 1960년대 프랑스는 자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식민지의 토착엘리트에게 정권을 넘기고 무력 투쟁 없이 식민지 독립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알제리를 비롯한 일부 국가에서는 민족주의자들과의 전쟁을 치루고 나서야 독립을 인정하였다.
특히 알제리는 프랑스와의 지리적 인접성, 좋은 기후조건과 생활환경으로 인해 이미 많은 프랑스인이 정착하여 살고 있었으며 프랑스인은 이 지역을 자국의 영토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따라서 프랑스는 식민지 유지를 위해 민족주의 세력과의 전쟁을 불사하였다. 알제리는 1954년부터 1962년까지 알제리 독립군인 민족해방전선(FLN)을 중심으로 프랑스와 독립전쟁을 치렀는데, 이 시기 상당한 알제리인이 프랑스로 이주하였다. 독립전쟁 직전인 1953년에 프랑스에 거주하던 알제리인은 약 18만 명이었으나, 1962년에는 35만 명으로 늘어났다. 전쟁 기간 중이었음에도 이 시기는 프랑스의 ‘영광의 30년(Les Trente Glorieuses)*’에 해당되는 경제적 호황기였던 반면 알제리는 전쟁으로 인해 어렵던 경제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제리 독립전쟁에 맞서 싸우기 위해 프랑스는 알제리로 약 50만 명의 청년들을 파병했으므로 해외로부터의 노동력이 필요했고 저렴한 알제리인 노동력은 프랑스 경제에 필요한 존재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1973까지 약 30년간의 프랑스 경제 호황기
모로코는 1956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후 모로코 당국에서 실업문제와 사회문제 완화를 위해 프랑스로의 이주를 권장했고, 알제리와 마찬가지로 이 시기는 프랑스 경제 성장 시기와 맞물리며 프랑스로 이주하는 모로코인이 늘어났다. 아울러, 프랑스는 알제리 독립전쟁 당시 알제리에서 충당하던 노동력의 일부를 모로코인으로 대체하기도 하였으며, 프랑스 당국이 알제리 이민자 비율이 높은 것을 의식하여 다양한 국적의 이주민을 받기 시작한 것도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알제리 독립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 내 모로코인 인구가 2만 명에서 5만 3천 명으로 크게 증가한 것이 이를 예증한다. |
|
|
+ 프랑스 동화정책, 종교중립과 이주민의 갈등
|
|
|
프랑스의 식민지배는 직접지배(direct rule)와 동화정책(assimilation)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식민지를 외국 영토가 아닌 프랑스 영토의 일부로 인식하여, 프랑스 본토에서 식민지로 프랑스인을 파견하여 식민지를 직접 관리 및 운영하며, 기존의 정치체제, 문화, 관습을 무시하였다. 아울러 동화정책은 식민지에 프랑스 문화를 이식하는 방식으로, 프랑스 언어와 관습, 프랑스식 교육을 강제하고 프랑스 문화에 동화된 소수의 아프리카 엘리트에게 프랑스 시민권을 부여하였다.
식민지의 독립 이후에도 동화정책은 프랑스 본토에서 이민자를 수용하는 사회통합모델의 기초가 되는 ‘공화주의 모델(republican model)’의 근간으로 작용하였다. 동화주의는 한 국가에 내재된 주류 문화와 비주류 문화 중 주류 쪽으로 통합을 이루려는 방법이다. 다시 말해, 이주민은 이주한 사회의 주류 구성원이 가지고 있는 언어나 문화를 받아들여 이주하기 이전 국가의 문화적 특징을 제거함으로써 이주한 사회에 흡수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주민이 이주한 국가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해당 국가의 문화 적응을 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이와 같이 동화주의는 이주민이 지닌 고유한 문화나 종교적 관습을 인정하는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와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공화주의 모델에 따라 프랑스 이주민 공동체는 공식적으로 혹은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프랑스의 학교 교육에서도 역시 공화주의적인 통일성을 강조하면서 이주민의 인종적, 종교적 성향을 고려하지 않는 ‘평등성’이 강조되었다. 이민자들의 정체성이 부정되고 공존보다는 프랑스 사회로의 동화를 강조하는 동화정책은 이민자 차별로 귀결되었다. 전문가들은 이를 프랑스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지나치게 이상적인 원칙이라고 평가하며 프랑스 이민자 중 상당수가 북서부 아프리카 출신이자 대부분 무슬림인데 피부색깔, 종교, 문화 등에 있어서 완전히 ‘프랑스인’이 되기는 어려우므로 이민자들의 개성과 문화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평가한다. 파트릭 베이(Patrick Weil) 파리 1대학 교수는 “흑인, 무슬림, 백인 주류 사회는 분명 다른 환경에 있다. 그러나 지금 프랑스는 이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프랑스는 헌법 1조에 “프랑스는 불가분적(indivisible), 비종교적(laique), 민주적, 사회적, 공화국이다. 프랑스는 출신, 인종 혹은 종교에 따른 차별 없이 모든 시민이 법 앞에서 평등함을 보장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불가분적’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프랑스 공동체가 분열될 수 없는 ‘하나의 완전한 실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프랑스 이민자들은 공화국의 가치를 인정하고 ‘프랑스인’이 되어야 한다.
한편, 헌법 1조에 명시된 세속주의, 종교중립성, 정교(政敎) 분리 등으로 번역되는 '라이시테(laicite)'는 특정 종교의 우위를 거부하고 공공장소에서 종교적 의식과 표식을 제한하는 원칙을 말한다. 다인종·다민족 국가인 프랑스는 종교 사이 갈등을 예방하고 사회통합에 다가가는 원리를 내세우고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소수종교 신봉자, 특히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도구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라이시테에 따라 공공장소에서 금지된 종교적 표식으로 무슬림의 전통복장이나 종교적 의식이 자주 언급되기 때문이다. 1989년 히잡(Hijab)* 논쟁, 2004년 학교에서의 히잡 금지법 시행, 2010년 공공장소에서의 부르카(Burka)** 금지법 시행, 2017년 프랑스 일부 지역에서의 부르키니(Burkini)*** 금지 등의 조치들은 무슬림 차별이라는 주장과 함께 논란을 일으켰다.
*무슬림 여성이 외출시 착용하는 의류로 얼굴 일부와 머리만을 가리는 천 **무슬림 여성 의복으로 신체 전부위를 가리며 시야확보가 필요한 눈 부위는 망사로 되어 있음 ***해변과 공공 수영장에서 전신을 가리는 무슬림 여성 수영복
|
|
|
+ 이민 1세대와 2-3세대의 차별을 바라보는 시선 차이
|
|
|
프랑스로 이주하여 프랑스 사회에 통합된 이민 1세대의 경우 차별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내면화하고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프랑스에서 이민 문제가 부각된 것은 1980년대 초반으로, 1950-1960년대에 프랑스에 온 북아프리카 출신 무슬림 이주 노동자 2세대의 나이가 20대가 될 즈음이었다. 20대가 되어 결혼이나 취업할 때를 맞은 무슬림 이민 2세대는 이민 1세대와 달리 프랑스 사회로부터 받은 차별을 참지 않았으며 이번 시위와 같이 촉발 기제가 발생할 때 그간 쌓여온 슬픔과 좌절을 쉽게 분노로 표출했다. 프랑스의 무슬림 이민자는 낮은 교육수준, 열악한 주거 환경, 높은 실업률을 겪으며 프랑스 사회 비주류 계층으로 자리하게 되었고 2005년 파리 교외 폭동, 2015년 샤를리 엡도(Charlie Hebdo) 테러 사건* 등과 같이 집단적으로 노현되었다. 특히 2015년 샤를리 엡도 테러 사건의 경우, 테러범 사이드 쿠아치(1980년생), 셰리프 쿠아치(1982년생), 아메디 쿨리발리(1982년생)는 알제리와 말리 이민자 가정 출신의 당시 30대 초반 청년이었다. 이들은 이민 1세대와 달리 파리와 파리 인근 도시에서 태어나 프랑스 교육을 받고 성장한 프랑스 국민이었다.
*프랑스 주간시사만평지 <샤를리 엡도>사가 마호메트에 대한 수위 높은 풍자를 한 것에 분노하여 2015년 1월 7일 발생한 테러로, 이 테러와 2015년 1월 9일 유대인 상점 이페르 카세에서의 인질극으로 약 20명이 목숨을 잃었다.
|
|
|
일련의 사건과 논란들로 인해 프랑스 사회에서는 무슬림을 비롯한 비주류 이민자 집단을 통합 대상이 아닌 위협요소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화 되었고, 극우파 정당인 민족전선(Front National: FN) 등에 의해 이민자 문제는 프랑스 정치의 핵심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2005년 파리 외곽 소요 이후 이민 문제는 2007년 대선에서 주요 쟁점으로 부각되었으며 “인간쓰레기들을 쓸어버려야 한다”고 외쳤던 전임 내무부장관 니콜라 사르코지(Nicola Sarkozy)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샤를리 엡도 테러 사건 이후 2017년에는 프랑스 형법 개정으로 경찰의 총기 사용 범위가 확대되었다.
2017년 프랑스의 한 독립 민권사무소 연구에 따르면 아프리카나 아랍계 남성이 5년간 경찰에게서 신분 확인을 요구받은 비율은 백인 남성의 3배, 5회 이상 불심 검문을 받은 비율은 9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2022년 경찰의 단속 과정에서 숨진 13명 대부분이 흑인이나 아랍계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아울러 최근 유엔인권고등판무관 대변인은 “법 집행에서 인종차별의 심각성을 진지하게 다뤄달라”고 촉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프랑스 경찰은 파리 교외에 마약 밀매, 갱단, 폭력이 만연해있기 때문에 강력한 치안 활동을 펴는 것이지 그들 인종 때문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이번 폭력 시위의 경우, 나엘을 총격한 프랑스 경찰 가족을 위한 성금으로 지난 4일 기준 150만 달러 이상이 모금되는 등* 프랑스 사회에 극우파의 영향이 짙어지고 있다.
*경찰관 가족을 위한 모금을 조직한 사람은 쟝 메시아(Jean Messiha)로, 지난해 4월 프랑스 대선에서 극우 후보 에릭 제무르(Eric Zemmour)의 대변인이었다. 한편 나엘의 어머니를 돕기 위한 모금은 20만 달러를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이와 같이 이슬람교를 믿는 유색 이민자와 세속주의를 표방하는 프랑스 사회와의 갈등은 깊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종교와 피부색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프랑스의 평등주의는 현실과 큰 괴리가 있는 신화에 불과하며 오히려 프랑스 사회에서 유색 인종들은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고 지적한다. 관용(Tolerance)과 세속주의(Laicite)를 전면에 내세워 인종차별을 외면해온 프랑스 사회가 이제는 이 주제를 직시하고 새로운 접근을 생각해야 할 때이다. |
|
|
06750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58, 외교타운 4층 한·아프리카재단
· TEL : 02-722-4700 · FAX : 02-722-4900
kaf@k-af.or.kr
수신거부 Unsubscribe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