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내용 바로가기
  • KAF 소식
  • 언론보도
언론보도

221013 [아프로40] 국내 1호 샤리아 전문가를 꿈꾸다- 김형훈 법무법인 정경 전문위원 [월드코리안신문]

관리자 / 2022-10-13 오후 1:10:00 / 1430
‘Af-PRO’는 국내 아프리카 전문가들의 모임이다. 외교부 한·아프리카재단에서는 이들의 활동을 소개한 책을 두 권 펴냈다. ‘Af-PRO, 한국과 아프리카를 잇다’는 제목의 단행본들이다. 한·아프리카재단의 허락을 받아, 이 책의 내용을 연재한다.[편집자주]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아랍어를 전공한 김형훈 전문위원은 국내에 샤리아(Sharia)를 전공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아랍어로 ‘길’을 의미하는 샤리아는 이슬람교가 추구하는 교리의 집합체이며 무슬림들에게 삶의 진리와 같다. 많은 사람들이 샤리아를 법과 착각하지만, 샤리아는 법을 뛰어넘는 훨씬 더 포괄적인 가치와 개념에 해당한다. 그 속에 법체계는 물론 모든 생활 규범, 심지어 정치, 경제, 종교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슬람 국가에서 외국 사람들이 샤리아를 모른 채 정치나 경제활동을 하다가 예상치 못한 문제에 봉착해 불이익을 받는 사례가 많았다. 우리가 이슬람 국가 혹은 무슬림들과 교류하는 데 있어 샤리아를 알고 이해해야 하는 이유다. 특히 2010년 기준 무슬림 인구는 16억 명이 이상으로 전 세계 인구의 23%를 차지하고 있으며, 나아가 꾸준히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전 세계에서 무슬림 인구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는 만큼 우리도 대비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샤리아는 이슬람 문화권에서 나고 자란 사람도 학위를 수료하는 데 10년 이상이 걸릴 정도로 어려운 학문이다. 특히 외국인에게는 샤리아를 공부할 기회조차 잘 닿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알제리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알제리 최고 권위의 ‘아미르 압둘 까디르 이슬람대학교’(Emir Abd El Kader University of Islamic Sciences) 대학원에 입학한 김형훈 전문위원은 이슬람 정신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샤리아를 공부하기 위해 15년이 넘는 세월을 헌신했다. 현재 박사 학위를 수료하고 논문 심사만 남겨두고 있는 김형훈 전문위원은 중동·아프리카 지역 전문 로펌 법무법인 정경에서 활동하는 중이다. 한국을 넘어 동북아 전체에서 손에 꼽히는 샤리아 전문가인 김형훈 위원은 논문을 마치는 순간까지 그렇게 불리는 것을 주저하지만 국내 1호 샤리아 전문가라는 호칭을 붙이는 일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슬람 문화에서 미래를 찾다

수능을 보고 진로를 고민하며 아버지에게 의견을 물었다. 대기업에서 오래 근무하신 아버지는 중동·아프리카 지역에 우리나라가 꼭 진출해야 함에도 아직 지역전문가가 없다는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리고 앞으로 전 세계에서 무슬림의 인구 비율이 점점 증가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도 이슬람 전문가가 꼭 필요할 것으로 전망했다. 어려서부터 누구보다 사회에서 쓰임이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랐던 나는 아버지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며 한국외국어대학교 아랍어과를 지원했다. 꿈을 실현하고자 누구보다 학과 생활을 열심히 하며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대에 입대했다. 일반 육군으로 복무하던 중 이라크에 파견된 서희·제마부대에서 아랍어 통역병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접했다. 부족한 실력이었지만 이라크 현장에서 도움을 주고 싶었고 또, 군 복무를 하면서 아랍어 실력도 쌓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라 생각했다.

다행히 부모님도 내 뜻을 지지했기 때문에 나는 통역병으로 지원했다. 하지만 겨우 세 학기 만에 아랍어를 얼마나 심도 있게 배웠겠는가. 이라크 현장에서 큰 도움이 되기에 내 실력은 턱없이 부족했고 자괴감이 들었다. 파병부대와 현지인 사이에서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어렵게 왔건만 할 수 있는 역할이 없어 괴롭고 초조했다. 이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나는 취침 시간을 쪼개서라도 아랍어를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다행히 부대에서 허락했고 매일 밤 쏟아지는 졸음을 쫓으며 아랍어를 공부했다. 덕분에 파병 8개월 동안 아랍어 실력이 부쩍 늘었고 통역병으로서 부대에 기여할 수 있었다.

<br>
알제리 수도 알저

이슬람 정신의 정수, 샤리아

아랍어과를 졸업한 선배들 중 중동·아프리카 지역에서 경제, 정치 등을 공부하고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슬람 관련 분야로 진출하는 사람은 드물다. 특히 샤리아를 전공한 이는 전무했다. 아랍어로 ‘길’을 의미하는 샤리아는 이슬람이 추구하는 교리의 집합체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 보면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길, 신에게 복종하는 길 등을 뜻한다. 아랍어과를 전공한 사람들은 모두 샤리아가 이슬람을 이해하기 위해 꼭 선행되어야 할 학문이라는 사실에 공감한다. 때문에 실제로 선배들 중 샤리아를 공부하려고 시도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슬람 문화의 정수이다 보니 외국인에게는 좀처럼 수학할 기회가 닿지 않았다. 운 좋게 기회가 닿더라도 워낙 심오한 학문이라 아직 국내에서 샤리아를 전공한 사람이 없는 실정이다.

일반적으로 샤리아를 ‘이슬람법’이라고 해석하는데, 실은 우리가 흔히 아는 서구의 법체계보다 훨씬 더 넓은 개념에 해당한다. 무슬림이 일상에서 하는 모든 선택과 결정은 샤리아를 기준으로 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이슬람 식문화인 ‘할랄(Halal)’과 ‘하람(Haram)’도 샤리아를 기반으로 결정된다. 할랄은 무슬림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하람은 먹을 수 없는 음식을 의미한다. 특정 음식 재료를 두고 먹을지 말지를 결정할 때 사람들은 샤리아에 언급된 내용에 따라 분류한다. 즉, 무슬림이 돼지고기를 먹거나 술을 마시지 않는 것 또한 샤리아를 기반으로 결정되는 사항인 셈이다.

무슬림 국가들은 국가 단위의 최고 규범인 헌법에 이렇게 명시했다. ‘우리 국가는 샤리아를 수용한다’, ‘샤리아는 최고의 규범 중 하나다’, ‘샤리아는 최고의 규범이다’ 등 표현에 약간씩 차이는 있어도 샤리아가 국가의 법체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에 해당한다는 의미는 일맥상통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슬람 국가에서 정치 혹은 경제활동을 할 때는 가장 먼저 샤리아에 부합하는지를 따지고, 부합할 때만 활동을 전개해야 한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들은 외국에서 사업을 할 때 그 나라 법률을 기준으로 하지만 이슬람 국가에서는 샤리아가 법체계는 물론 경제활동을 규제하는 기준으로 작용하므로 샤리아를 모르고 사업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슬람 국가에서 혹은 무슬림과 교류하는 데 있어 샤리아를 모르면 큰 실례를 범하거나 여러 가지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일례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국내 자본시장 활성화를 위해 이슬람 금융의 국내 진출이 거론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자를 청구하거나 지급하는 행위를 금하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상품은 거래할 수 없는 등 샤리아에 어긋나는 사업에는 투자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무산되었다. 이처럼 우리의 사고방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제한사항이 많으므로 국내에도 샤리아 전문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아직 국내에 샤리아 전문가가 부재하기에 누군가가 꼭 해야 한다면 내가 선구자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오다

2005년은 우리나라에 이슬람이 전파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하여 대규모 학술대회가 열렸고 나는 통역관으로 자원했다. 이슬람과 타 종교의 공존과 협력을 주제로 여러 이슬람 국가의 석학과 고위 관계자들이 모였다. 그중 나는 알제리 이슬람 최고회의 의장님을 수행하는 일을 맡았다. 나흘 동안 의장님을 따라다니며 아랍어 통역을 하다 보니 의장님과 가까워졌고 진솔한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나눴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우리나라에도 샤리아 전문가가 필요하지만 여러 여건상의 한계로 아직 도전하는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동시에 내가 선구자가 되어 이슬람 국가와 우리나라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데 일조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br>
알제리 북동부에 위치한 콘스탄틴

내 이야기에 공감하는지 한참 동안 머리를 크게 끄덕이던 의장님이 내게 물었다. 알제리에서 샤리아를 전공할 생각이 있느냐고. 너무 뜻밖의 제안이라 나는 반신반의했지만 어쩌면 일생일대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기회가 생기면 꼭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의장님은 그때부터 나를 알제리 국비장학생으로 유학할 수 있게끔 알아보기 위해 여기저기 전화를 돌렸다. 나는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유학이 실제로 성사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학술대회 일정이 끝나고 의장님과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눈 후 다시 학생의 신분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몇 달 후 거짓말처럼 ‘아미르 압둘 까디르 이슬람대학교’ 대학원 입학서류와 항공권이 팩스로 전달됐다. 아미르 압둘 까디르 이슬람대학교는 알제리 최고 권위의 이슬람 대학교였다.

의장님께서 내게 이토록 특별한 기회를 안긴 이유는 나를 특별히 여긴 까닭도 있지만, 우리나라에 샤리아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내 이야기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꼭 해내야겠다는 사명감이 강해졌다. 당시 알제리는 치안이 그리 좋지 않았고 테러 소식도 심심하지 않게 들려왔다. 하지만 의장님께서 어렵게 마련해준 기회를 거절할 수 없었고 이슬람과 한국을 잇는 교두보가 되겠다는 목표에 한 발 더 가까워지기 위해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부터 알제리와 북아프리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 알제리를 소개하는 책이 많지 않았기에 알제리 관련 영문서적을 구해가며 최대한 많이 배우고자 노력했다.

알제리를 공부하면서 알제리를 비롯해 아프리카대륙은 ‘기회의 땅’이라는 생각이 점점 더 확고해졌다. 천연자원이 풍부한데도 당시 우리나라 기업들이 많이 진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제리를 비롯해 아프리카는 향후 한국에 꼭 필요한 지역으로 자리 잡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또한 알제리 국비장학생으로 유학 가는 만큼 훗날 우리나라와 알제리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정말 열심히 공부해야 하겠다고 다짐했다. 부모님과 당시 여자친구였던 아내가 다행히도 내 뜻을 존중해주었고 나는 알제리 국비장학생으로서 꿈을 향해 낯선 땅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