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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8 [아프로 38] 여행객과 지역민 모두가 주인공인 여행을 꿈꾸다 - 설재우 여행 작가 [월드코리안신문]

관리자 / 2022-09-08 오후 1:40:00 / 1396

‘Af-PRO’는 국내 아프리카 전문가들의 모임이다. 외교부 한·아프리카재단에서는 이들의 활동을 소개한 책을 두 권 펴냈다. ‘Af-PRO, 한국과 아프리카를 잇다’는 제목의 단행본들이다. 한·아프리카재단의 허락을 받아, 이 책의 내용을 연재한다.[편집자주]

설재우 작가는 자신이 나고 자란 서촌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지역문화’라는 개념을 국내에 도입했다. 자신만의 독보적인 길을 개척해온 설재우 작가는 많은 영감과 아이디어를 아프리카대륙으로부터 받았다고 한다. 서른살에 머리를 식힐 겸 떠난 탄자니아에서 지역 내 커뮤니티가 발달한 환경을 접한 그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후 귀국하여 서촌 지역전문가로 활동하며 탄자니아에서 보고 느낀 점들을 적극 활용했다.

그리고 탄자니아에서 멋진 풍경과 좋은 인연을 만날 때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 여행하길 소망하여 여행 기획자이자 가이드라는 새로운 꿈을 마음에 품기 시작했다. EBS <세계테마기행>을 통해 나미비아를 찾은 설재우 작가는 아프리카대륙이 얼마나 넓고 다양한 문화로 채워져 있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사막으로 추정되는 나미브 사막(Namib Desert)에서 자신이 예전부터 그토록 원했던 진정한 의미의 자아성찰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것은 자신을 돌아볼 틈도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꼭 한 번 경험해볼 만한 인생의 순간이었다.

설재우 작가는 고심 끝에 많은 사람들이 경험해보길 바라는 마음에서 자신이 직접 가이드하는 ‘나미비아 원정대’를 기획했다. 전문 여행 기획자이자 가이드로 경력을 쌓은 그는 이제 여행객은 물론 현지인이 주인공이 되는 공정 여행을 꿈꾼다. 코로나19로 나미비아에 갈 수 없는 대신 지금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아프리카대륙을 바라보는 건강한 시각을 심어주고자 다양한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있다. 아프리카 여행에 대한 사람들의 개선된 인식이 양분이 되어 훗날 나미비아 공정 여행이 싹 틀 것을 희망하며 말이다.

인생의 새 출발을 위해 탄자니아를 찾다

2010년 서른살이 되던 해, 잘 다니던 회사를 과감히 그만두고 아프리카대륙으로 봉사활동을 떠났다. 인생을 새로 시작하기 위해 주변을 정리하며 재충전을 하고 싶어서였다.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거리가 가장 먼 아프리카대륙이라면 새 출발이 가능할 것 같았다. 나에게 주어진 역할은 탄자니아의 한 시골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컴퓨터 교육이라고 대단한 수준이 아니었다.

어차피 컴퓨터도 사양이 한참 떨어지는 모델이었다. 추가로 설치된 프로그램이 없어 최대한 기존에 설치되어 있는 프로그램을 활용해 아이들이 컴퓨터와 친해질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지뢰 찾기’ ‘솔리테어(solitaire) 카드게임’ 등이 컴퓨터에 기본 사양으로 선택된 이유를 알았다. 이들 프로그램은 컴퓨터의 기본 기술을 익히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지뢰 찾기는 마우스를 클릭하는데, 솔리테어 카드게임은 마우스로 드래그(drag)를 하는 데 익숙해지도록 고안된 게임이었다. 나는 이 두 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하여 아이들이 쉽고 재미있게 컴퓨터를 받아들이도록 유도했다.

당시 내가 있던 마을에는 현지 언어로 된 컴퓨터 교재가 부재했다. 벽촌의 아이들에게 영어는 낯선 언어였으므로 영어로 된 교재를 현지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 시급했다. 아이들이 영어를 곧잘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현지 언어로 된 교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영어-스와힐리어 사전을 낱낱이 뒤지며 교재를 스와힐리어로 한 자 한 자 옮겨 나갔다. 그런데 문제는 영어의 어휘를 스와힐리어의 그것으로 정확하게 옮기기가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어 ‘끌다’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드래그’를 대체할 만한 스와힐리어 낱말이 없었다.

드래그는 가장 기본이 되는 컴퓨터 용어였기에 꼭 스와힐리어로 번역을 해야 했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나는 기지를 발휘했다. 특정 위치에서 마우스 버튼을 누른 채 아래로 끄는 드래그 동작이 고양잇과 동물이 발톱으로 나무를 긁는 동작과 유사하게 느껴졌다. 그리하여 스와힐리어로 고양이를 뜻하는 단어 ‘파카(paka)’의 동사형을 드래그를 대체할 단어로 선택했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고양이가 발톱으로 나무를 긁는 동작을 몸소 흉내 내며 드래그의 방법과 기능 등을 설명했다. 낯선 기계 활용법을 가르치려고 온 이방인의 등장에 한껏 긴장했던 아이들이 내 뜻밖의 행동에 한바탕 웃더니 금세 긴장을 풀고 놀 듯 수업에 참여했다.

기지와 재능을 발휘하여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큰 보람을 느꼈다. 현지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도 새롭고 즐거웠다. 나를 에워싼 천혜 자연은 더할 나위 없이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그런데도 나는 그곳에서 보낸 1년 동안 많이 울었다. 사무치게 외로워서였다. 말과 문화가 완벽히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쌓이면서 나는 마치 갓난아이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교성이 좋은 편이라 현지 친구들을 여럿 사귀었지만, 끝끝내 나는 이방인이었고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컸다.

그동안 사회적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에 많이 지쳤는데, 1년 동안 삶의 궤적에서 완전히 벗어나 보니 그 관계 속에서 내가 얼마나 많은 행복을 느끼고 자존감을 가졌는지 새삼 깨달았다. 아름다운 풍광을 목도하고 좋은 인연을 만날 때마다 그 감흥을 온전히 나눌 사람이 없어 아쉬워하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다른 한국인 친구와 함께 있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혼자 즐기기 아까운 순간에 상상 속 친구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 나는 실제로 친구들을 데려왔을 때 무엇을 보여주고 어디를 데려가면 좋을지를 구체적으로 상상했다. 머릿속에 짠 일일 코스는 곧 이틀, 사흘, 나흘의 코스로 확장됐고, 막판에는 완벽한 열흘 안팎의 탄자니아 여행 코스로 발전했다. 그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일이 당시 내게는 가장 즐거운 일종의 유희였다.

탄자니아에서의 경험으로 힌트를 얻다

나는 대학에서 연극영화를 전공하고 광고대행사에서 경력을 쌓았다. 봉사 활동을 떠나기 직전에는 나고 자란 서촌을 알리는 차원에서 내가 좋아하는 동네 명소를 온라인에 소개하는 일을 했다. 그 덕분인지 나는 구체적으로 여행을 기획하고 사람들을 인솔하는 상상할 수 있었다. 내가 짠 코스 속 장소들은 하나같이 현지 사람들이 즐겨 찾는 현지 명소였다.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이미 너무 많이 알려진 곳들은 시시하게 느껴져 최대한 배제했다. 내가 머물던 마을은 킬리만자(Kilimanjaro)로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

눈만 뜨면 아프리카대륙을 상징하는 킬리만자로가 내 고향 서촌의 인왕산처럼 한눈에 들어왔다. 킬리만자로는 아프리카대륙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한 번쯤 꼭 가보고 싶어하는 명소다. 그런데 나는 킬리만자로 자체보다 산 주변에 숨어 있는 현지 명소들이 더 가치 있게 느껴졌다. 내가 보고 느낀 것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킬리만자로와 그곳에 기대 사는 사람들의 다채로운 삶을 찬찬히 보여주고 싶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사람들을 모아 킬리만자로 일대를 함께 여행하겠다고 다짐했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다시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하루하루를 바삐 지냈다. 그렇다고 탄자니아에서 했던 수많은 다짐을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니었다. 현실에 쫓기면서도 탄자니아 친구들과 연락을 이어갔으며, 내가 점 찍은 장소들이 여전히 아름답고 가치 있는지 들여다봤다. 우리나라는 도시 간 연결이 잘 되어 있지만, 탄자니아 도시들은 외딴 섬처럼 서로 떨어져 있다. 도시 간 이동하려면 끝없이 이어진 황량한 벌판을 따라 6시간 이상 이동해야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보의 교환이나 유통이 수월하지 않았다. 대신 도시 내에서 정보를 공유하는 커뮤니티가 발달했다. 예를 들어 일자리나 사람이 필요할 때 외부에서 끌어올 여력이 없으니 내부에서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다. 사람들은 남들에게 알리거나 나누고 싶은 소식이 있으면 시내에 위치한 카페를 찾았다. 카페에 비치된 큰 게시판에는 갖가지 소식을 담은 형형색색의 종이들이 붙어 있었다. 우리가 신문의 지면을 사듯 탄자니아 사람들은 1달러를 내고 게시판의 한 귀퉁이를 빌려 소식을 전했다.

게시판에는 구인구직부터 가게 오픈, 할인까지 일상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넘쳐났으므로 지역 사람들에게 카페에 들르는 것은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나아가 그 카페는 게시판을 가득 채운 소식들을 글로 정리하여 정기적으로 보내주는 메일링 서비스도 했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그 메일링 서비스가 탄자니아에서는 오래전부터 지역 문화로 정착해 있었던 셈이다. 나는 귀국한 후에도 메일을 꾸준히 구독하며 탄자니아를 향해 귀를 열어 뒀다. 또, 탄자니아 도시 내에서 정보가 순환하고 사람들이 소통하는 모습을 보며 서촌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데에도 많은 힌트를 얻었다.

나를 채워준 나미비아

그러던 중 2014년 내 인생에 운명처럼 전환점이 찾아왔다. EBS <세계테마기행> 팀으로부터 출연을 제안받은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닌 아프리카대륙에 속한 국가 나미비아였다. 평생에 한 번도 가기 힘들다는 아프리카대륙을 또다시 밟을 기회가 찾아온 셈이다. 특히, 나는 유럽도 가본 적이 없을 만큼 해외 경험이 많지 않았기에 아프리카대륙과 자꾸 연이 닿는다는 사실이 더 신기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운명의 장소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2011년 <서촌방향>이라는 책을 내고 서촌에 지역문화 창작 공간을 운영하며 지역문화를 연구하는 작가로 활동하는 중이었다.

그때까지 즐길 거리, 볼거리 위주로 소개하던 <세계테마기행> 팀이 인문학적인 접근을 해보고자 지역 연구가인 내게 연락을 해온 것이었다. 아프리카대륙이라고 하니 귀가 솔깃했으나 나미비아는 생전 처음 듣는 지명이었다. 섭외 전화를 끊고 바로 나미비아를 검색했다. 뜻밖에도 SBS 예능 프로그램 <정글의 법칙>이 검색됐다. 당시 신상 프로그램이던 <정글의 법칙>이 첫 촬영지로 나미비아의 힘바민족들이 사는 오지 마을을 찾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명이나 국가명이 아닌 민족명이 부각되면서 방송 이후에도 나미비아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출연을 결정하고 줄곧 나미비아 관련 정보를 찾았다. 나미비아는 탄자니아와 전혀 다른 국가였다. 탄자니아는 상대적으로 북쪽에 위치하며 고산지대다 보니 기온이 낮아 사람들이 두터운 옷을 갖춰 입고 다녔다. 한편, 나미비아는 남쪽에 위치하며 건조해 사람들의 옷차림이 단출했다. 두 국가의 문화는 옷차림만큼이나 이질적이었다. 우리에게 부시맨(Bushmen)으로 알려진 코이산족도 남부아프리카에 속한 민족이었으며, 거기에 힘바민족까지…. 앞날의 고생이 그려졌다. 내가 아프리카대륙에서 유일하게 알던 탄자니아는 도시화가 많이 전개돼 있었다. 휴대전화와 컴퓨터가 제법 보편화돼 있었다.

그런데 검색을 통해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나미비아는 건조하고 척박한 사막의 나라이자 원주민의 땅이었다. 실제로 제작진은 그들의 전통문화를 볼 수 있는 장소 위주로 코스를 짰다고 했다. 덜컥 겁이 났다. 그런데도 전염병에 노출될 위험은 없는 듯했다. 탄자니아에 갈 때는 말라리아, 장티푸스 등 각종 전염병에 대비해 예방 접종을 했다. 그런데 나미비아는 예방 접종이 필요 없는 국가라고 했다. 다행인 것 같으면서도 마음 한켠에서는 의구심이 들었다.

정말 이대로 아무 대비 없이 가도 되는 것일까. 복잡다단한 마음으로 나미비아의 빈트후크 국제공항(Windhoek Hosea Kutako International Airport)에 도착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공항의 첫인상이 도시의 전체 인상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빈트후크 국제공항은 크고 깔끔하며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질서정연하게 이뤄지는 입국 절차를 보며 같은 아프리카대륙에 속한 국가여도 사회 분위기나 문화는 다를 수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아프리카대륙은 초기 인류사의 흔적들이 여럿 남아 있는 땅이다. 특히 나미비아에서 많은 흔적이 발견된다. 수천 년 전에 그려진 암벽화를 마주할 때마다 나는 우리 위의 역사에는 과연 무엇이 존재했을지를 상상했다. 또 나미비아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사막으로 추정되는 나미브 사막이 있다. 사막 한가운데에 자리한 삐쩍 마른 고목들이 과거에 변화무쌍했던 이 땅의 역사를 묵묵히 증명하고 있다. 나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 기어코 찾아오고 마는 이유를 언뜻 알 것 같았다. 내가 서른 살에 그랬듯 사람들은 인생에서 지치고 힘들 때 자석에 이끌리듯 아프리카대륙을 찾는다.

삶의 궤적에서 멀리 떨어지는 과정을 통해 인생을 돌아보고자 한다. 그런 경험들이 나미비아에서 훨씬 더 극대화되는 것 같다. 마치 영겁의 시간 동안 도를 닦은 수행자처럼 비어 있고 죽어 있는 오래된 사막 한복판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비우고 그 여백을 새로운 기운으로 채운다. 나 또한 낯선 사막에서 충격과 영감이 소용돌이치며 머릿속이 비워지고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종교나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진귀한 경험이었다. 마치 내 안의 묵은 감정들이 사막의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스러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