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217 [아프로27] 아프리카 미술에서 인간성의 단서를 찾다 - 정해광 아프리카미술관 관장·갤러리 통큰 대표 [월드코리안신문]
관리자 / 2022-02-17 오전 10:09:00 / 1959국내 대학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하고 정치철학을 배우기 위해 스페인 마드리드로 떠난 정해광 관장은 그곳에서 뜻밖의 삶의 여로를 발견한다. 마드리드의 한 벼룩시장에서 만난 아프리카 조각상에서 다년간 철학을 공부하며 그토록 찾아 헤맨 인간성의 단서를 발견한 것. 철학과 교수의 번드르르한 말과 세련된 전문 용어로 점철된 책보다 아프리카 조각에서 더 깊은 철학적 메시지를 찾아냈다. 정해광 관장은 그때부터 선현의 진리가 담긴 말을 수집하듯 아프리카 조각을 모으기 시작했다. 개인의 지적 열망을 채우기 위해 시작된 수집 활동은 세계백과사전에 등재된 명작을 만나며 점점 생업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무엇보다 미술 작품을 통해 아프리카 사람들이 가진 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것이 인간성을 잃은 현대인들에게 인간의 가치와 존엄을 일깨워주는 귀한 계기가 되리라 그는 믿는다. 아프리카 조각에서 회화로 시야를 확장한 정해광 관장은 제대로 조명되지 않은 아프리카 회화의 세계를 견고히 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며 집필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아프리카 조각에서 철학적 메시지를 발견하다
1989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유학하던 시절의 일이다. 하루는 마드리드에 위치한 엘 라스트로(El Rastro) 벼룩시장에 재미삼아 구경 갔다. 수천, 수만 개에 달하는 공예품 중 아프리카에서 바다를 건너온 조각상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처음 보는 아프리카 조각상의 면면에 마음이 사로잡혔다. 철학도이지만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고미술품과 도자기를 모으는 모습을 보며 컸고, 대학 진학 후에는 미대생들 틈에서 작품 보는 눈을 길렀다. 모조품이 대부분이었으나 아프리카 조각상이 내뿜는 낯설고 신선한 매력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여다봤다. 그러던 중 그 속에서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작품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 마음에 들어왔다. 한 노신사가 보리수로 추정되는 나무 아래에서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잠겨 있는 조각이었다. 크기는 아담했으나 시공을 초월하는 듯한 묘한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특히 번뇌를 벗어난 것 같은 그의 평온한 모습이 철학을 공부하는 내 마음을 움직였고, 나는 평생을 가장 치열하게 고민한 휴머니티(Humanity) 즉, 인간성에 대한 단서를 그 작품을 통해 찾을 수 있을 듯한 희망을 엿봤다. 당장 데리고 가 매일 들여다보며 그와 함께 해탈하고 싶었다. 하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당시 한 달 생활비가 한화로 50만원이었다면, 조각상의 가격은 13만원 정도였던 것이다. 나는 그날부터 저렴한 과자와 우유로 생활하며 악착같이 생활비를 모았다. 그 사이 혹여 조각상이 팔리지 않을까 초조한 마음에 시간이 허락될 때마다 시장에 들러 확인도 했다. 생활비를 아껴 3개월 만에 비로소 조각상을 손에 넣은 나는 아프리카 조각상이 품은 철학적 메시지에 이끌려 그때부터 하나 둘 모으기 시작했다.
그 이듬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든 작품을 만났다. 나는 이 만남을 통해 철학가의 길을 포기하고 아프리카 미술 전문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바로 카메룬 바문(Bamun)족의 청동 잔이었다. 당시에만 해도 이 작품이 대외적으로 얼마나 대단한 가치를 지녔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그 속에서 읽히는 철학적 메시지에 강하게 이끌렸다. 엎드린 자세를 취한 남성의 꼬리뼈 부분에 꼬리이자 뿔처럼 생긴 거대한 잔이 솟아 있었다. 그리고 위로 갈수록 점점 넓어지는 잔 바깥으로는 다양한 문양이 빼곡히 조각돼 있었다. 그 조각들의 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자 꼬리뼈에서 잔이 시작되는 좁은 지점을 기점으로 인간과 유전자가 20퍼센트 일치하는 10억 년 전의 선충에서부터 40% 일치하는 5억 년 전의 곤충, 그리고 2억 년 전의 파충류까지 순서대로 새겨져 있었다.
나는 이 잔 조각이 인체가 영겁의 시간을 거쳐 수많은 종의 생명체를 흡수하며 지금의 형태에 이른, 인류 진화의 역사를 논하고 있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놀라운 작품의 가격은 나의 세 달치 생활비와 맞먹었다. 하지만 유기체적 세계관의 이데아를 엿볼 수 있는 이 명작을 놓칠 수 없었다. 돈을 마련할 방법을 고민하던 나는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께 마드리드에 전셋집을 구했다고 거짓말을 해 목돈을 받았다. 그 돈을 청동 잔을 비롯하여 평소 눈여겨본 아프리카 조각품을 사는 데 거의 다 소진한 나는 여분의 돈으로 남은 유학 생활 동안 월세를 내며 버틸 집을 찾아 마드리드에서 1시간 30분 떨어진 외곽으로 갔다. 가구라고는 매트리스 한 장이 전부였다. 하루는 스위스 친구가 취직하여 첫 월급을 받았다며 집에 놀러왔는데 남루한 환경에 자못 놀란 눈치였다.
바문족의 잔 조각은 내 예상대로 예사 물건이 아니었다. 스페인의 한 선교 단체가 카메룬에서 봉사활동을 마치고 돌아갈 때 왕이 선물한 예물이었다. 나처럼 그것이 예사로운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한 선교 단체는 이를 자국의 세계백과사전에 등재할 것을 출판사에 요청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답이 없자 이를 여러 사정상 시장에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카메룬 왕의 예물을 내가 운 좋게 손에 넣은 것이다. 그때 당시에는 가격이 비싸다고 여겼지만, 그 속에 깃든 역사적 배경과 가치를 고려했을 때 전혀 비싼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돈을 마련할 때까지 조각상이 100일 가까이 그 자리에서 기다려준 것을 생각하면 분명 사람과 사물 사이에도 인연이 따로 있는 듯싶다. 나는 그때 사물에도 특정한 에너지가 있어 사람이 사물을 고르듯 사물도 사람을 고른다는 사실을 처음 체감했다.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나는 확신한다. 왜냐하면 2000년대 초반에도 비슷한 경험을 또 했기 때문이다. 국내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하는 틈틈이 나는 아프리카를 여행했다.
한번은 부르키나파소의 수도 와가두구(Ouagadougou)에 위치한 문화거리를 들렀다. 우리나라의 인사동과 유사한 이곳은 지역의 공예품과 골동품으로 가득차 여행자들이 자주 찾는 관광 명소였다. 거리에 들어서자마자 입구 정면에 사람 키 높이의 여성 조각상이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부르키나파소가 아닌 말리 밤바라(Bambara) 사람들의 작품이었다. 1천 킬로미터 떨어진 낯선 곳에 엉뚱하게 와 있는 이 조각상이 풍기는 기운에 압도되었다. 특히 조각상의 풍만한 가슴을 보는 순간, 자신의 아이들을 배불리 먹이고 싶다는 염원을 담아 작품을 조각한 작가의 마음이 와 닿으며 내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나는 입구에 위치해 있으며 누가 봐도 감탄할 만큼 뛰어난 아름다움을 내뿜는 이 조각이 그때까지 팔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때 한 번 더 사물이 인간을 선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실감했다. 나는 그 작품으로부터 간택 받은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리하여 무더위 속에서도 그 무거운 조각상을 이고 여행가방을 끄는 수고를 즐거이 감내했다.
조각에서 회화로 시야를 확대하다
나날이 고조되던 아프리카 조각품을 향한 집념이 꺾일 뻔한 위기도 분명 있었다. 1990년대 서울과 마드리드를 오가며 박사 논문을 마무리 지은 나는 1998년 비로소 박사 학위증을 받으러 마드리드를 다시 찾았다. 유럽에 또 언제 오게 될지 모르니 간 김에 친구와 자동차로 유럽 도시들을 훑고 귀국할 계획을 짰다. 미처 서울로 옮기지 못한 소장품과 여행길에 새로 구입한 아프리카 조각품이 더해져 트렁크가 가득 찼다. 하루는 바티칸 성당 앞에 차를 세우고 주변을 둘러본 후 돌아왔는데 차 유리창이 깨져 있고 트렁크가 텅텅 비어 있었다. 트렁크 가득 쌓여 있던 아프리카 조각품은 물론 박사 학위증까지 모조리 사라진 상태였다. 첨언하자면 스페인은 왕이 박사 학위증에 일일이 친필 서명을 하기 때문에 학위증을 받는 데만 1년이 걸리며, 재발급을 받는 일은 훨씬 더 지난하다. 그럼에도 나는 학위증을 잃어버린 것보다 수년간 배곯아가며 어렵게 모은 아프리카 조각품들을 한순간에 잃었다는 사실에 더 분노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우리는 로마에서 마드리드까지 쉬지 않고 운전하여 하루 만에 돌아왔다. 그래도 분을 삼키지 못한 친구는 바로 공항으로 가 가장 빠른 항공편을 구해 귀국했다.
한편, 나는 어려서부터 화가 나면 도서관에 가 책을 읽는 버릇이 있었다. 당장 책에 파묻히지 않으면 무슨 사고라도 칠 것 같아 도착하자마자 대학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그때 다짐했다. 아프리카 조각과 내 인연은 여기까지라고, 더 이상 아프리카 예술을 들여다보지 않겠다고. 그런데 습관이 참 무서운 게 나도 모르게 펼쳐 든 책이 아프리카 예술 서적이었다. 그 책은 세계적 수준의 스페인 출판사 에스파사 칼페(Espasa-Calpe)가 출간한 백과사전 시리즈 중 하나에 속했다. 책장을 넘기며 분을 삼키던 중 낯익은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무심하게 책장을 넘기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사진 속의 조각품이 아무래도 내가 소장한 작품 같았기 때문이다. 바문족의 청동 잔 조각 말이다. 나는 한걸음에 학교 앞 단골 골동품 가게로 향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주인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백과사전에 등재되면 가치가 수억 원을 호가할 정도로 껑충 뛴다며 ‘횡재했다’고.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상상을 초월하는 금전적 가치 때문에 기쁘기도 했으나, 그런 작품과 내가 연이 닿았다는 사실에 날아갈 듯이 기쁜 심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동안 주변 사람들로부터 핀잔을 들으면서도 생활비를 아껴가며 작품을 모은 내 노력이 한순간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아프리카 예술과 연결고리가 끊어질 뻔했던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되어 우리 둘을 더 단단히 엮어줬다.
내가 지난 30년 동안 열 일 제치고 아프리카 조각에 빠져 쫓아다닌 이유는 그 속에 인간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동양철학, 윤리학, 정치철학을 공부한 철학도로서 내가 여태껏 치열하게 탐구한 인간성에 대한 단서를 아프리카 조각품에서 찾았다. 현란한 논리로 무장한 현대 철학의 어느 학파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인간성을 아프리카 조각에서 명징하게 봤다. 하지만 2004년 무렵부터 아프리카 곳곳에 인터넷이 설치되면서 더 이상 좋은 조각상을 구하는 일은 힘들어졌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해외에서 자신들의 조각상이 어느 정도의 금전적 가치를 갖는지 알고 난 후 좋은 물건은 내놓지 않거니와 내놓더라도 부르는 가격이 터무니없이 높았다. 더 이상 내가 아프리카 조각을 수집하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아프리카 회화로 눈을 돌렸다. 아프리카의 조각과 회화는 전혀 다른 시대와 배경 속에서 발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