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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0 [아프로25] 마그레브 지역과 그 문화를 깊이 연구하다 - 임기대 부산외국어대 교수 [월드코리안신문]

관리자 / 2022-01-20 오후 3:21:00 / 1830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파리 유학길에 오른 임기대 교수는 살아있는 언어를 박제된 틀에 재단하는 듯한 당시의 언어학 공부에 회의를 느꼈다. 그리하여 박사 과정을 앞두고 언어의 역사와 인식론으로 전공을 틀었다. 언어학, 역사학, 문화사회학, 철학 등을 아우르는 통합된 학문이었다. 낯선 파리에서 하루아침에 성과를 내기란 어려웠다. 그럼에도 걸출한 교수의 세심한 지도와 오랜 시간 당구를 치며 쌓아온 상상력과 체계적 사고가 맞물려 성공적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임기대 교수는 박사 과정을 거치며 학문적 관심이 끌린 북아프리카를 보다 더 심도 있게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그맘때쯤 예상치 못한 제안을 받았다. 알제리의 국립대학인 알제대학교(University of Algiers)에서 한국학 강좌를 맡아 달라는 제안이었다. 이미 프랑스에서 수많은 마그레브(Maghreb) 사람을 보아왔지만 그들이 왜 이곳에 오고, 어떤 언어와 종교를 비롯한 문화적 특성이 있는지 늘 궁금해 하고 있던 차에 임기대 교수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한국학 강의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다 알제리를 중심으로 튀니지, 모로코 등 마그레브 지역을 직접 관찰하고 연구할 일생일대의 기회로 여겼기 때문이다. 임기대 교수는 알제리에서 보낸 2년 동안 산전수전 다 겪었지만, 그 시간을 묵묵히 견딘 덕에 국내에서 마그레브 지역 연구자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는 북아프리카를 단순히 아랍·이슬람 문화권 중의 하나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에서 탈피하여 이곳에 실재했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공부했을 때 개인과 국가 모두에게 더없이 좋은 기회가 열릴 것이라고 강조한다.

어학에서 파생한 새로운 학문을 통해 견문을 넓히다

불어불문학을 전공한 나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파리 제8대학에서 언어학으로 석사 과정을 밟던 중 문득 회의감이 들었다. 언어는 생동하며 변화하거늘, 이전 세대나 유행에 따라 만든 이론의 틀에 맞춰 해석하고 공부하는 일이 더 이상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나는 애초에 대학에 남아 공부를 계속할 생각이었다. 이때 어문학으로는 창창한 앞날 동안 어떤 연구를 지속할 수 있을지 암담했다. 석사 과정을 겨우 마친 나는 박사 과정을 준비하며 언어의 역사와 인식론을 공부하기를 바랐다. 언어의 역사와 인식론은 언어를 중심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인간의 사유 체계를 탐구하며 인간 사회가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어떠한 구조가 있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철학과 사회지역학에 가까웠다. 실제로 어학은 물론 철학, 논리학, 문화사회학 등을 두루 공부해야 했다. 언어의 역사와 인식론에 정통한 파리 제7대학교의 실뱅 오루(Sylvain Auroux) 교수는 내가 박사 과정을 앞두고 방향을 틀어 본인의 지도를 받고 싶다고 하자 처음에는 반대했다. 그는 이 분야에서 전 세계로부터 인정을 받은 권위 있는 교수였다. 본인이 가르치는 언어의 역사와 인식론은 서양의 전체 역사부터 서양 사람들의 인식, 사고 구조 등을 꿰뚫어야 하는데, 나는 이미 한국에서 모국어인 한글로 모든 사상을 주입 받았기 때문에 이제 와 접근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했다.


국내는 물론 아시아 전역에서 역사와 인식론의 차원에서 언어를 연구해야한다는 필요성은 제기되어왔지만, 실뱅 오루 교수가 말했듯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는 쉽지 않은 학문이었던 만큼 대부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동양인으로서 거의 최초로 그 교수의 제자가 되겠다고 나선 것. 그것도 학문의 마지막 관문인 박사 과정을 앞두고 말이다. 교수가 반대할 만했다. 하지만 나는 끝끝내 뜻을 꺾지 않았고 결국 파리 제7대학에서 그의 제자가 되었다. 실뱅 오루 교수는 나를 제자로 받아들이는 대신 매일매일 숙제를 내줬다. 나는 학기 내내 수십 권에 달하는 전문 서적을 섭렵했다. 그 방대한 양의 공부를 통해 나는 자연과학의 방법론만으로는 인문학과 사회학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환경에서 다른 사고 체계를 형성한 내가 짧은 시간 안에 서양 언어 속 역사 인식론에 훤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교수였던 실뱅 오루 교수의 찬사를 받으며 박사 학위를 성공적으로 취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구가 있었다. 나는 과감하게 당구의 산술 체계를 도입하며 새로운 이론을 세우고 내 나름의 논리를 다졌다. 자연과학의 방법만으로는 인간 언어의 체계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내가 당구의 복잡한 산술 체계로부터 얻어낸 가장 커다란 성과였다.

당구가 열어준 새로운 기회

나는 예나 지금이나 못 말리는 당구쟁이이다. 대학에 진학하자마자 당구의 세계에 빠져 학과 공부에 소홀할 정도였다. 하루 5시간 이상씩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덕에 1년 만에 1천 점의 경지에 다다랐다. 파리로 유학을 가서도 프랑스 국가 대표들과 틈틈이 당구 실력을 겨뤘으며, 1990년대에는 프로당구사로 정식 등록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나는 당구를 치면서 당구공이 일정한 법칙과 수학의 원리에 따라 움직여야 하지만 큐를 잡은 사람에 따라 동선을 달리한다는 사실이 늘 새롭고 신선했다. 공의 무수한 원리가 자연과학처럼 늘 일정하고 체계적이지 않음을 당구의 산술 체계와 ‘나’라는 주체에서 배운 것이다. 더불어 세상에는 영원한 법칙과 규칙이 있다는 서구 과학주의 학문 방식에 회의감을 느꼈다. 나는 당구의 변화무쌍함이 인문학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다양성과 일맥상통한다고 느꼈다. 학문에 몰두해 생각이 벽에 부딪힐 때마다 당구에서 배운 다양성과 불규칙성을 접목시켰다. 그 결과 나는 당구의 속성을 통해 사회문화 등 다양한 분야를 포용할 수 있는 너른 시각을 가질 수 있었으며, 아프리카 언어에 대해서도 서구인이 바라보는 관점과는 다른 관점을 견지할 수 있었다. 내가 박사 논문에 당구의 원리를 접목시키자 지도교수는 자신이 봤던 그 어떤 논문보다 창의적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구 덕을 톡톡히 본 것.

사실 당구는 아프리카와도 인연이 깊다. 당구의 기원은 프랑스와 벨기에 왕실과 귀족 문화에 있다. 지금이야 당구공을 합성수지로 만들지만, 그전에는 코끼리의 뿔인 상아를 깎아 제작했다. 실제로 벨기에의 아라미스(Aramith)라는 회사가 전 세계 당구공의 70~80퍼센트를 생산한다. 19세기 프랑스와 벨기에가 여러 아프리카 국가들을 식민 통치하며 얼마나 많은 상아를 가져가서 자신들의 놀이거리로 썼을까. 가끔 모난 곳 없이 완벽하게 동그랗고 반짝이는 당구공을 보며 씁쓸함을 느끼는 이는 나뿐이 아닐 터. 특히 나는 박사 과정을 거치며 문화 상대주의의 관점에서 세계사를 다시 들여다보며 자연스럽게 아프리카와 같이 소외되었던 지역의 언어들이 새로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여태껏 한국에서 배운 세계사와 세계관이 얼마나 편협한지 깨우쳤다. 특히 프랑스 내 많은 인구를 차지하는 북아프리카국가 출신의 사람들 그리고 그 문화에 관심이 쏠렸다. 단언컨대 이때의 사고관은 이미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맞고 있는 현재에 유용한 사고였다. 당연히 지도교수의 가르침이 단단히 한몫을 했다.

실뱅 오루 교수는 늘 내게 우리 세대는 경계를 넘나들며 학문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언어학뿐만 아니라 철학, 사회학, 인류학, 논리학 등을 아우르는 그의 분야야말로 탈경계에 해당하는 ‘통섭’의 학문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프랑스와 우리나라 사이에는 인식이 변화하는 속도에 차이가 있었다. 혹은 온도 차이라고 할까.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한 나는 오히려 대학에서 설 자리가 별로 없었다. 내 공부가 불어불문학에도 그렇다고 철학과에도 속하지 못했다. 실제로 불어불문학회에 가서 논문을 발표하면 돌아오는 반응은 ‘정말 좋은 내용이나 이것을 국내에서 어떻게 활용할지’였다. 한편, 철학학회에서는 순수 철학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경계와 분야를 나누기 좋아하는 한국 학계에서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해 한동안 방황한 나는 결국 대안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부터 학문적 관심이 머물던 북아프리카 공부를 보다 더 심도 있게 해보기로 결심했다.

게다가 이 지역 연구는 내 공부의 연장선상에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등 아프리카 북서부 일대에 속하는 지역을 단순히 이슬람 문화권 중의 하나로 한정지어서 본다. 그래서 이 지역을 아랍어로 ‘서방’을 의미하는 ‘마그레브’라고 부르는 것도 동일한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들 지역을 대표하는 종교가 이슬람교이기는 하다. 하지만 마그레브에 속하는 지역 사람들의 실제 목소리를 들어보면 그들은 종교가 이슬람교일 뿐, 자신들이 아랍화되었다는 견해를 부정한다. 민족의식이 강한 그들은 스스로를 ‘아마지그(Amazigh)’라 부르기도 한다.

‘아마지그’는 자체 민족어로 ‘자유로운 사람’ 혹은 ‘고결한 사람’을 뜻한다. 한편, 서양 사람들은 아마지그를 ‘베르베르(Berber)’라고 부른다. 아무래도 베르베르가 우리에게 더 익숙한 단어인 만큼 나는 우선 그들을 베르베르라고 부르고 소개한다. 국내에서 가뜩이나 낯선 존재이자 관념인 만큼 최대한 익숙한 단어를 활용하는 쪽이 더 낫다고 판단해서다. 수천 년 동안 외부로부터 침략을 받아왔던 베르베르인들은 특히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으며 많은 사람들이 아랍화됐다. 마지막까지 아랍화에 저항한 사람들이 명맥을 이은 베르베르 문화와 언어는 마그레브 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있다. 나는 마그레브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며 국제 사회가 이 지역을 얼마나 편협한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깨달았다. 아프리카 지역에 있는 고유의 문화, 게다가 사하라(Sahara)의 베르베르인은 아프리카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런 지역을 아랍-이슬람으로만 해석하다니! 마그레브 지역에는 우리나라 기업이 특히 많이 진출해 있다. 이때 우리가 그 지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진정한 교류나 교역이 이뤄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마그레브 지역과 베르베르어를 연구할 당위성을 느낀 나는 향후 대학에 마그레브 연구소를 개설하며 이 지역을 본격적으로 탐구하리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