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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7 작은 축구공을 굴려 큰 희망을 만들다 [크리스찬타임스]

관리자 / 2022-01-07 오후 5:32:00 / 1915

임흥세 감독의 이름 앞에는 ‘우승 제조기’라는 수식어가 따랐다. 김주성, 홍명보, 하석주 등의 거물급 선수들을 배출하며 ‘스타 제조기’ 역할도 했다. 국내에서 지도자이자 사업가로 큰 성공을 일군 임흥세 감독은 인생의 하프타임을 지나 후반전에 돌입하자 부와 명예 대신 축구 선교사가 되어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으로 향했다. 당시 우리에게 남아공이 낯설었듯이 그들에게도 한국은 낯선 존재였다. 하물며 혈혈단신 남아공을 찾은 이방인에게 누가 관심을 기울였겠는가. 그러나 케이프타운(Cape Town) 외곽의 빈민촌을 찾은 임흥세 감독은 그곳에서 소외된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쳤다. 축구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아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축구공을 건네는 임흥세 감독에게 현지에서도 이목이 집중되기 시작했고, 2010 남아공 월드컵 때는 남아공 유소년 축구대표팀 감독직에 오르기에 이르렀다. 빈민촌을 돌며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치며 선수를 발굴한 임흥세 감독은 월드컵 이후 남아공이 빠르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역할을 다한 것 같아 흐뭇한 마음으로 짐을 쌌다. 그리고 아프리카대륙에서 가장 열악한 환경에 놓인 남수단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전쟁의 공포가 채 가시지 않은 황무지에서 임흥세 감독은 아이들과 축구공을 차며 희망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패배에 익숙했던 아이들이 승리를 꿈꾸기 시작했고 남수단 청소년 축구 국가대표팀이 기적처럼 국제대회 4강에 오르기도 했다. 아프리카대륙 최빈국 중 하나인 남수단으로서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의 승리는 불가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바늘구멍만 한 가능성을 딛고 승리를 이뤄낸 아이들을 보며 임흥세 감독은 스포츠를 통한 선교의 가치를 재차 깨달았다. 축구를 통해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새 희망을 안겨 준 임흥세 감독은 오늘도 스포츠로 자신의 길을 걸어나가고 있다.

스포츠 선교를 위해 남아공으로 향하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나는 주말마다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올린다. 그러던 어느 날 24살이 되었을 때 기도를 하다가 문득 가장 열악한 곳에서 축구를 통해 봉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마도 내가 가진 역량을 쓰임 받고자 간절히 드린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내려준 소명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 아직 젊었던 나는 인생의 하프타임이 찾아올 때까지 축구 감독으로서 필드에서 열심히 뛰었다. 그리고 훗날 인생의 후반전에 돌입하면 축구감독을 은퇴하고 아프리카대륙으로 날아가 나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온 덕분일까. 내 인생의 전반전은 화려했다. 1992년 아시아 청소년 학생 축구대회에서 우승을 견인하는 등 연이은 승보에 ‘우승 제조기’라는 기분 좋은 별명을 얻었다. 지도자로서 김주성, 홍명보, 하석주 등 한국 축구의 대들보 같은 선수를 배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시작한 스포츠용품 사업도 크게 성공했다. 그러나 인생의 하프타임이 다가왔음을 직감했을 때 나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스포츠 선교사가 되어 남아공으로 향했다.

15년 전만 해도 아프리카대륙은 지금처럼 우리나라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미지의 세계였고 선교 사역을 위해 아프리카에 간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부시맨’ 혹은 ‘타잔’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나의 지식수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입으로는 ‘사명감’, ‘소명’을 운운했지만 막상 혼자 인천국제공항을 빠져나가자 두려움이 커졌다. 과연 그곳에 무엇이 있을지, 말은 통할지, 그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축구는 모두가 좋아하고 어울릴 수 있는 소통수단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만큼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되뇌이며 애써 긍정적인 기운을 불어넣었다. 마침내 도착한 케이프타운의 시내는 서울 못지않게 세련되고 화려했다. 순간 안도감이 들었으나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이런 지역이 아니었다. 때문에 주로 소외계층이 생활하는 빈민촌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곳에서 만난 아이들의 초점 잃은 눈빛에 심장이 멎는 듯했다. 축구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 나는 에이즈에 걸리고 가난에 허덕이며 버거운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왠지 죄스럽게 느껴졌다. 마음이 급해졌다. 아이들을 위해 무엇이라도 빨리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나는 빈민촌의 한 초등학교에 축구팀을 창단했다.

첫 연습 전날 밤, 나는 잠을 설쳤다. 아이들이 아무도 나오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나는 남아공에서 이방인이였다. 들어보지도 못한 나라에서 온 낯선 이방인을 과연 반겨줄지 의문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동안 절망 속에 갇혀 무기력하던 아이들이 과연 하루아침에 희망을 찾겠다고 운동장을 뛸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자꾸만 작아지는 마음을 기도로 다잡고 학교로 향했다. 그런데 기적같은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이들이 우르르 나와 마을 입구부터 나를 반겼고 황량하던 학교 운동장이 아이들로 가득 차 그 수를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700명에 달하는 아이들이 축구를 배우기 위해 몰려왔던 것이다. 여태껏 보지 못한 마을 아이들의 활기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날의 감동은 평생 잊을 수 없다. 내 인생의 명장면이라고 할까. 그날의 아이들의 함성과 열기는 가끔 타향살이에 지치고 외로울 때 나에게 그 무엇보다 힘을 실어주었다. 

축구가 만들어낸 남아공의 기적
남자아이, 여자아이 가릴 것 없이 축구를 배우러 찾아오는 아이들이 점점 늘어났다. 그날부터 나는 하루도 쉬지 않고 축구 교실을 열었다. 한국인 선교사와 현지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으며 축구 교실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행정 수도인 프리토리아(Pretoria)의 시청에서 내게 빈민가 아이들을 대상으로 축구를 가르치는 프리토리아 유소년팀 감독직을 제안했다. 시 차원의 지원이 있다면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흔쾌히 제안을 수락했다. 프리토리아에서 유소년팀 감독을 역임하며 내가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을 더 넓고 깊게 찾아다녔다. 월요일에는 시청 사무실에서 행정 업무를 보고, 화요일에는 고아원, 수요일에는 거리의 부랑자, 목요일에는 소년원, 금요일에는 학교, 토요일에는 클럽팀으로 옮겨 다니며 지도했다. 일요일에는 교회에서 봉사 활동을 한 후 그제야 반나절 정도 개인 시간을 가졌다. 프리토리아 도시 전역을 누비느라 첫 석 달간 1만1,000km를 이동하기도 했다. 특히 소년원에 수감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축구를 처음 가르치려 했을 때 어려운 난관이 많았다. 교도소에 축구 교실을 열고 싶다고 하니 담당기관에서 난색을 표했다. 느슨한 경계를 틈타 탈옥을 하거나 폭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머뭇거리는 눈치였다. 나는 법무부 장관과 차관을 만나 설득에 나섰다. 소년원의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안겨줘야 수감 생활을 잘 마무리하고 사회에 나가서도 잘 적응하지 않겠느냐고. 긴 설득 끝에 무거운 철문이 열렸다.

축구는 전문 스포츠 종목인 동시에 놀이 수단이다. 1시간가량 뒤엉켜 놀다보면 중범죄를 저지른 수감자도 친구가 된다. 함께 축구를 하는 동안 수감자들을 진정한 친구로 대하면 그들도 곧 마음을 연다. 나는 그 과정에서 과거의 잘못과 힘겨운 현실에 가려져 있던 그들의 밝은 모습을 발견했다. 축구를 통해 익힌 건전한 스포츠 정신이 그들의 삶에도 깊숙이 깃들기를 바라며 매주 기꺼이 교도소를 찾았다. 나중에는 교도소 내 축구팀을 여럿 양성하여 교도소 리그까지 만들었다. 또한, 2010 남아공 월드컵 때는 2002 한일 월드컵이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큰 힘이 됐듯이 그들 스스로 교화되고 감화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며 교도소에 대형 텔레비전을 세 대 기증하기도 했다. 축구를 통한 선교활동이 조금씩 주변국가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나미비아, 말라위, 케냐 등지에도 축구 교실을 세웠다. 오지에 있는 마을에서는 축구를 지속적으로 가르칠 인력이 부족했기에 축구 교육 과정을 DVD로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특히 말라위에서는 축구 코치 50명을 선발하여 4박 5일간의 교육과정을 거쳐 자기 지역에서 축구 인재를 양성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탰다.

2010 남아공 월드컵을 기점으로 그동안의 노력들이 인정받기 시작했고 주변으로부터 많은 지원이 뒤따랐다. 남아공 정부는 2010 남아공 월드컵 때 내게 12세 이하 유소년 대표팀 감독을 맡겼고, 프리토리아 시청은 8만여 제곱미터에 달하는 학교 부지를 축구 선교를 위해 쓰라며 무상으로 내줬다. 홍명보 감독은 스승이 타지에서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시청이 제공한 부지에 잔디 축구장을 지어줬고, 선수 시절 선배로 모시던 허정무 감독은 2010 남아공 월드컵이 끝나고 돌아가면서 선수들이 사용한 물품 일체를 기증했다. 또한, 2011년에는 만델라재단(Nelson Mandela Foundation)으로부터 감사패를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봉사하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성취감에 잠시 젖어 있는 동안 월드컵의 열기가 뜨겁게 달구고 지나간 남아공에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물로 배를 채우던 아이들이 맥도날드와 코카콜라를 먹고, 축구장을 누비던 아이들의 발에는 나이키 운동화가 신겨져 있었다. 어느새 남아공은 더 이상 나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곳으로 바뀌고 있었다. 축구 지도자도 여러 명 배출한 터라 나는 내 도움을 더 절실히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 미련없이 짐을 쌌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을 찾아 남수단으로 떠나다
남수단에 도착해보니 남아공이 천국처럼 느껴졌다. 2011년 7월 주권국가로 독립한 신생국가 남수단을 이듬해 10월에 찾은 격이었으니 국가건설을 위한 노력이 절실한 때였다. 나라 전체가 내전으로 황폐해졌으며, 언제 충돌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람들은 피폐해져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에이즈도 퍼져 있었다. 특히 고인이 된 이태석 신부가 활동하며 국내에 알려진 시골 마을 톤즈(Tonj)의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불을 붙이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부싯돌을 사용하고 있었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나는 축구의 힘을 믿었지만 숨 쉬는 것조차 힘든 아이들에게 뛸 수 있는 체력이 남아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우선 아이들이 안전하게 뛰어놀 수 있도록 버려진 공터를 발견해 깨진 유리 파편과 깡통 조각 등을 줍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마을 사람들도 뙤약볕 아래 모래바람을 들이마시며 연신 쓰레기를 줍는 모습에 조금씩 마음을 열고 청소를 도왔다. 공터가 어느 정도 정비되자 축구 교실을 열었다. 다행히 맨발의 아이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이 열악한 곳에서 20개 축구팀과 600명의 선수들을 모으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축구가 가진 힘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공 하나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축구가 고마웠고, 내가 다른 종목이 아닌 축구를 선택한 것이 정말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남수단으로 넘어온 지 1년 만에 고비가 연거푸 찾아왔다. 비포장도로에서 자동차가 전복되어 목숨을 잃을 뻔했는가 하면, 말라리아와 장티푸스에 걸려 죽다 살아났다. 어느 날인가부터는 알 수 없는 복통이 찾아왔다. 진통제를 먹으며 꾸역꾸역 버텼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고통은 점점 커져갔다. 요로결석이었다. 기온이 50도까지 오르니 물을 아무리 많이 마셔도 소변이 아닌 땀으로 배출돼 요로결석에 걸린 것이다. 남수단에서는 치료가 어렵다고 해 잠시 귀국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아파서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아이들이 찾아와 내 손을 부여잡고 ‘파파, 돌아올 거지?’라고 물었다. 나는 아이들의 간절한 눈빛을 보며 마음이 미어지는 듯했다. 그들이 행여 불안해할까 고통 속에서도 밝게 웃으며 금방 돌아오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위암 판정을 받았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그동안 남수단에서 제대로 먹지 못해 위암에 걸린 것이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하여 수술을 받으면 완치될 수 있었다. 수술 날짜를 받고 병상에 누워 있자니 이 몸 상태로 남수단에 돌아가는 것이 과연 맞을지 슬슬 고민이 됐다. 슬픔에 잠긴 가족들의 얼굴을 보니 더욱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남수단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의 얼굴이 눈에 밟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남수단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내게 주어진 외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족들을 설득한 후 수술 다음날 바로 비행기표를 끊고 일주일 뒤에 남수단으로 돌아갔다. 수술 후 7kg이 빠지는 등 후유증을 크게 겪었지만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위암은 워낙 진행 속도가 빨라 더 늦게 발견했다면 죽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 앞에 놓인 삶이 또 다른 선물처럼 느껴졌다.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고 여기니 앞으로 못할 것이 없어 보였다. 생각이 더 명료해진 나는 남수단에 돌아가자마자 국가대표팀 감독직 제안을 수락하며 남은 내 인생을 남수단의 선교활동에 바치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