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11 [아프로20] 아프리카 음식을 통해 청년 창업을 도모하다 - 엄소희 키자미테이블 대표 [월드코리안신문]
관리자 / 2021-11-11 오후 2:57:00 / 1889엄소희 대표는 공정무역을 통해 국제개발협력 분야를 처음 접했다. 공정무역의 홍보담당자로서 그 당위성을 주장하려면 개발도상국의 실상을 직접 보고 스스로 느끼는 바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리하여 직장을 과감히 포기하고 아프리카로 향했다. 많은 개발도상국 중에서도 아프리카국가를 선택한 것은 ‘이 기회에 가장 멀고 가장 모르는 나라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케냐와 카메룬을 옮겨 다니며 3년간 봉사 활동을 전개할수록 엄 대표는 아프리카의 속도에 맞추어 공생하는 삶이 자신에게 의미 있다는 사실을 점점 더 크게 깨달았다. 특히 아프리카 청년들의 실업 문제에 공감했다. 그들의 일자리 문제를 해소할 단서를 찾기 위해 국내의 한 창업 교육 프로그램에 지원했다가 그곳에서 운명처럼 르완다에서 봉사 경험이 있는 류현정 대표를 만났다. 셰프 출신의 류 대표와 엄 대표는 둘의 뜻을 모아 르완다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 나갔다. 스와힐리어로 ‘사회적’을 뜻하는 단어 ‘키자미kijamii’에 영어 단어 ‘테이블table’을 결합한 ‘키자미테이블’이 바로 그 결과물이다. 특히 외국인의 눈높이에 맞춘 르완다 음식 전문 레스토랑이라는, 기존에 없던 형태의 서비스를 통해 르완다 사람들의 문화 자긍심을 높이는 한편 청년들에게 고용과 자립을 위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오랜 시간 언론인을 꿈꿨다. 부모님이 작은 가게를 운영해 가계를 꾸리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한편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세상 이야기들은 그들의 고단한 삶과 어쩐지 동떨어져 보였다. 부모님을 위로하거나 대변한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어렸지만 우리 부모님과 같은 소시민의 사연에 귀 기울이고 이를 사회에 전하는 언론이 부재하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자연스럽게 작은 목소리를 들을 줄 아는 언론인이 되는 꿈을 품었다. 당연한 수순으로 대학에 진학하며 신문방송학과를 지망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언론 고시를 준비하며 보다 시야가 넓은 기자가 되기 위해 다양한 봉사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중 하나가 ‘아름다운가게’의 공정무역 관련한 활동이었다. 당시 아름다운가게는 국내 최초로 공정무역의 개념을 소개했다. 내게도 무척 생소한 분야였다. 아름다운가게에서 봉사하며 처음으로 국경 밖 소외된 이들의 존재를 발견하고 그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회사로부터 뜻밖에 정식 입사를 제안받았을 때 나는 내가 오랫동안 꿈꿔온 그늘진 곳에 빛을 비추는 일이 꼭 기자만의 영역이 아님을 처음 깨달았다. 그리하여 나는 오랜 다짐을 깨고 더 많은 관심을 요하지만 우리가 더 무관심할 수도 있는 개발도상국의 소외계층을 조명하는 공정무역 단체에서 일하기로 결심했다. 한 3년을 숨 고를 틈 없이 바삐 일했다. 그러던 중 두려운 마음이 엄습했다. 국내에서 공정무역 시장을 선도하는 아름다운가게의 홍보담당자로서 내가 뱉은 언어들이 공신력을 갖는 일이 돌연 무서워졌다. 사회 초년생에 이제 막 공정무역에 눈떴을 뿐인데 말이다. 공부를 더 해야 할 것 같았고, 개발도상국의 실상을 직접 봐야할 것 같았다. 그리하여 덜컥 회사를 그만두고 봉사 활동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때마침 대학 선배 중 한 명이 국내 NGO에서 케냐로 파견되어 일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그 선배가 있는 케냐로 향했다.
케냐에서 주어진 시간은 1년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방과 후 활동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일을 도맡았다. 주로 아이들이 교과목으로 배우지 못하는 노래나 연극 등의 예체능을 놀이하듯 가르치며 정서적으로 교감했다. 여성들을 대상으로 문해교육이나 마을 주민들의 소득증대를 위한 모임도 학교에서 열리곤 했다. 여러 활동 중 하나가 마을 여성들이 소모임 형태로 구슬공예 제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공정무역 일을 한 경험이 있는 내게 그 일이 떨어졌다. 그들이 만든 수공예품이 사업으로 성장 가능한지 여부를 판단하고 부족한 요소를 채울 수 있도록 독려했다. 선생님을 모셔와 마을 부녀자들의 수공예 기술을 한층 향상시키기도 하고 지역 여성들과 함께 시장 조사를 하고 판로를 찾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나는 이곳에서의 삶을 받아들일 준비가 스스로 되어 있는지 혹은 공정무역 분야로 돌아갈지를 홀로 치열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예정된 시간이 다 되도록 확신이 서지 않았다. 수조원에 달하는 공적개발원조 기금이 현장에서 잘 쓰이는지도 좀 더 면밀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다시 채비를 갖추어 아프리카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케냐와 분위기가 사뭇 다른 서아프리카 카메룬을 목적지로 삼았다. 케냐에서 1년을 보낸 덕에 더 빨리 적응할 수 있었고, 카메룬에서 보낸 2년 동안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거의 모든 일을 다 했다고 자부할 정도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을 통해 아프리카의 속도에 발맞추어 공생하며 살아가는 삶이 내게 충분히 의미 있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앞으로도 이 일에 매진할 수 있는 동력을 찾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