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에 앞서
투아렉이란 이름의 환상적 이미지와 고되고 암울한 현실의 괴리 사이에서...
한국사람들에게 투아렉(Touareg)이란 이름에서 처음 떠오는 것은
아마도 독일의 모자동차 회사에서 생산하는 대형SUV 차량일 것입니다.
육중한 몸체에서 뿜어내는 우렁찬 소리와 함께 달리는 광경을 시내 거리에서 심심치 않게 보곤 합니다.
'일상을 탐험으로'라는 모토로 이 차량을 선전하는 카탈로그엔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을 질주하고
거친 산악을 오르는 장면을 보여주며 도시의 따분한 일상을 한 번에 날려버리는 듯 한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왜 도시와 사막을 질주할 수 있는 대형차량에 투아렉이란 이름을 선사했을까요? 투아렉이란
사하라남부의 사헬(Sahel)사막지역에 낙타를 타며 서아프리카와 북부아프리카 및 아랍권을 이어 중계무역을
하던 유목민인들을 일컫습니다. 서부 및 중남부 아프리카인들과는 달리 언어도 베르베르어를 쓰는 무슬림들입니다. 인디고계통의 푸른 터반(이들을 청색인-Blue People-이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을 두르고 황량한
사막을 낙타로 이동하는 모습에 프랑스 식민지 초기 서양학자들이 매료되어 이들의 생활방식과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황량하고 끝없는 사막을 가로지르는 모험과 신비의 상징으로 고급차량의 이름이 될 정도로 투아렉이란 이미지가
자리잡게 된 것이라 여겨집니다.
유럽열강이 아프리카를 식민화할 당시 사하라와 사헬의 사막지대는 버려진 땅이었습니다. 당시 식민개척자들에게 경제적, 정치적 이해가 없었던 탓에 케익조각
마냥 사막 위에 인위적으로 국경을 긋고 분할통치하였습니다. 투아렉인들은 현재 말리와 니제르 및 부르키나파소의
북부, 알제리와 리비아의 남부에 거주하고 있지만 식민화과정에서 이들의 문화와 목소리는 철저히 배제되었고
탈식민지 이후에도 각각의 신생정부로부터 사회적인 차별을 경험하게 되었습다. 말리와 니제르의 투아렉인들은 60년대 국가설립 이후부터 지속적인 독립운동과 투쟁을 벌이며 투아렉 독립국가를 설립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던지고
있습니다. 도시일상을 탈출하는 낭만적이고 고급스런 이미지의 투아렉과 그들의 비정한 현실사이의 괴리는
가혹할 정도로 깊어보입니다.
2012년과 2013년에
걸쳐 일어난 말리분쟁은 말리북부의 사헬사막지역 투아렉인들의 분리주의운동이 근본적인 원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말리정부의 부패 및 약화로 인한 군사구테타가 일어나 거버넌스가 약화된 상황에서 이슬람극단주의자들 및 마약-무기밀매
조직 등이 결합하여 매우 복잡한 형태의 국제분쟁으로 변화하였습니다. 먼 이웃의 이야기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도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가진 책임있는 일원로서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하고 평화정착에 기여할 수 있는 성숙한 시각과 마음가짐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들어가서
2012년
말리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났는가?
2012년 3월 22일, 아마두 투아마니 투레(Amadou
Toumani Toure) 대통령이 이끄는 말리정부가 아마두 하야 사노고(Amadou Hay
Sagogo) 대위가 지휘하는 쿠데타군에 의해 전복되었습니다. 한편 오래 전부터 민족적
차이와 사회적 차별을 이유로 독립을 시도하던 투아렉사람들의 아자와드 민족해방운동(Mouvement National
pour la Liberation de l'Azaward, MNLA)과 마그레브 지역 이슬람극단주의 세력이 연합하여 말리북부 사헬사막지역을
장악하고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프랑스는 상호방위밀약을 맺은 말리에 직접개입을 피하고
관망하며 여러 외교체널을 통해 MNLA세력과 물밑 협상으로 투아렉 민주정부수립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평화협상을
시도하였습니다.
투아렉독립운동을 넘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연합하여 지역안보 불안의 씨앗이 되고...
하지만 점차 이슬람 마그레브 알카에다(AQIM)와 서아프리카 지하드
통일운동세력(MUJWA) 등 과격세력이 기존 MNLA세력을
배격하고 말리북부를 장악하였고 급기야 2013년 1월 10일, 이슬람테러세력과 결탁한 북부말리세력이 남부말리의 관문이 되는
코나(Konna)지역을 점령하였습니다. 전략요충도시인 코나지역이
함락되어 수도인 남부 바마코(Bamako)가 이슬람근본주의세력에게 넘어간다면 주변국에 미칠 안보불안과 그 파급효과는
막대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말리군부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게 되었고 프랑스에게 파병요청을 하였습다. 프랑스정부는 이에 신속히 대응하면서 다음날인 1월 11일에 유엔의 결의안을 채택하고 4000여명의 프랑스 정예부대를
파견하여 세르발작전(Operation Serval)을 수행하기에 이릅니다.
2. 말리분쟁에 대한 국제사회 개입과 결과
지역안보 불안 앞에 프랑스와 국제사회는
개입하기에 이르고...
이와 병행해 프랑스는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 회원국의 4000여 명의
병력지원(La Mission internationale de soutien au Mali, MISMA)과
핵심인접국인인 알제리의 동의를 얻어내고 유럽연합의 만장일치의 결의안을 도출한다. 유럽의 각 국가들도
의료서비스, 항공 및 항해 군운송수단 등을 제공하였고 유럽의회는 말리군강화를 위한 훈련프로그램(European Union Training Mission in Mali)을 지원하기로 하였습니다. 미국 또한 간접적으로 위성정보와 무인항공기(UAV)를 제공하며 프랑스의
개입을 후면지원하였습니다. 참여한 모든 국가 및 국제행위자들은 말리의 주권 및 통치력회복, 대태러전, 북부말리지역의 마약밀매와 불법무기밀매 근절 및 차단 등의
보편적 명분으로 설득한 프랑스에 의해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세르발(Serval)작전으로
전투를 초기진압에 성공한 것으로 평가…하지만 분쟁을 종식할 수 없어...
많은 전문가들이 미국 아프카니스탄의 경험을 토대로 프랑스가 이슬람테러리스트들과의 전투에서 매우 고전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세르발 작전 개시 이틀 만에 코나를 수복하고 북부말리세력들이 장악했던 북부의 주요지역인 가오(Gao),
톰북투(Tombouctou), 키달(Kidal)지역을
단 보름만에 회복하였고, 2월 2일 프랑스와 올랑드가 바마코와
톰북투를 직접 방문하여 승리하였음을 선언하였습니다. 프랑스 식민지 경험과 아프리카 지역전문가를 통한 심층적
지역이해, 프랑스어권 지역군들과의 효율적인 소통 및 최근 프랑스의 군대개혁, 알제리의 적극적 공조 등이 주효했던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평하였습니다.
말리 북부의 전투에서 조기에 승기를 잡은 프랑스군이었지만 실질적인 전투 종료는 2014년
7월에서야 이루어졌고 바르칸(Barkane)작전이라는 새로운
대테러작전을 프랑스의 지휘아래 진행하게 됩니다. 이처럼 국지적인 전투에는 승리하여도 분쟁의 원인이 제거되고
치유되지 않는 이상 분쟁은 지속되고 폭력은 상존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선 그 원인을
알고 처방을 해야합니다. 그렇다면 말리분쟁은 원인은 무엇일까요?
3. 말리분쟁의 원인
3.1. 장기지속원인: 투아렉문제
말리분쟁의 뿌리는 투아렉인들의 프랑스식민지통치에
대한 역사적 저항에서 시작하고…
말리사태의 핵심 촉발 원인 중 하나는 2012년에 분출된 투아렉인들의
분리주의운동이었습니다. 말리북부의 장기지속원인(long term
cause)인 ‘투아렉문제’를 파악하는 것은 분석을 위한 핵심적인 사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투아렉인들은 경제문화와 종교 문화적으로 말리남부의 사람들과 매우 다른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투아렉인들은 말리남부지역인들과 달리 대부분 다양한 종족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슬람을 신봉하고 있는
무슬림들이지만, 일처제를 유지하는 등 유연하고 자유로운 이슬람적 종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북아프리카 아랍어 계통인 베르베르어권에 속해있고, 중세시기부터
낙타와 카라반을 이용해 아프리카와 아랍권을 잇는 금과 노예중계무역을 행하던 유목인들이었습니다. 다양한
종족구성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종교적 문화와 경제생활문화가 투아렉이라는 집단구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인구분포상으로
투아렉인들은 사헬사막 전역을 걸쳐 이동하며 생활하였으나 현재 니제르(800,000), 말리(500,000), 알제리(15,000), 리비아(10,000), 부르키나 파소(5,000) 등에 분할거주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는 투아렉인들이 불평등한 말리국가체제에
복속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프랑스 제국군의 강력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투아렉은 식민화 초기부터 강하게
저항하였고, 카오센 아그 케다(Kaosen ag Kedda)는
투아렉의 독립적인 비전을 제시하며 프랑스의 식민화를 지연시키는 등 투아렉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초 식민화가 완성되었을 당시 사헬 및 사하라 사막지역에 경제적 이익이 없었던 프랑스는 사헬지역을 인위적인
국경으로 분할하였고, 말리의 식민통치 과정에서도 북부말리지역은 정치참여와 경제개발 및 문화혜택을 차등적으로
받게 되는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기존의 유목을 통한 경제활동은 이에 구조적으로 약화 도태되었고, 1913년 발생한 아이르(l’Air)지역의 대가뭄은 결정적으로 투아렉
사회를 소멸에 가까운 지경으로 몰고 가게 되었습니다.
독립이후도 말리정부의 투아렉 차별정책은 지속되고…
탈식민지 이후 말리독립정부의 수립 이후에도 투아렉인들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소외되고 주변화되었습니다. 1950년대 아프리카의 독립 논의가 진행되면서 아프리카 각 지역의 정치 엘리트들은 자신의 국가를 설립하는데
경쟁함으로써 투아렉의 지역은 여러 국가의 국경선에 의해 나누어지게되었습니다. 정착화(sedentarization)나 방관정책(lassez-faire)을
유지하였던 리비아, 알제리 등과 달리 모디보 케이타(Modibo
Keita)가 이끄는 말리정부가 강한 중앙집권화 정책을 펼치면서 투아렉인들에 대한 체계적인 인종적 차별이 진행되었습니다.
1990년 이후 니제르와 말리의 투아렉에게 지원된 국제원조지원금의
환수에 대한 반발로 지속적인 저항운동이 시작되었고 각국의 대응은 매우 폭력적이었고, 이에 국제인권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도 중재에 나섰으나 두 정부의 반군에 대한 공격과 보복은 계속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특히 니제르와 말리북부에 존재하는 지하자원(우라늄, 석유: 니제르)에 대한
반발 문제로 중앙정부는 계속적인 관여와 중앙집권적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1992년 말리중앙정부의
정치적 해결을 위해 투아렉반군의 말리정규군 편입, 북부지역개발 등을 약속하며 평화조약을 체결하였으나, 실질적인 차별과 보복이 지속되면서 2006년~2007년 다시 저항군이 결성되어 반란을 일으켜, 결국 ‘아랍의 봄’ 이후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에 피신하였던 투아렉 저항군들이
다시 남하하여 독립군을 형성하면서 2012년의 저항전쟁이 촉발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2. 상황요인: 중동근본주의세력의 아프리카 유입
‘아랍의
봄’ 이후 리바아 거버넌스 붕괴 및 근본주의세력의 남하가 사태를 촉진하고…
‘아랍의 봄’ 이후 리비아의 중앙집권적 거버넌스가 붕괴되어 치안약화
및 각종 조직과 종교적, 문화적 아이덴티티에 기반을 둔 군소집단들이 난립하게 되었고, 특히 살라피즘(salafism)에 기반한 이슬라미스트 세력의 득세로
향후 말리사태에 직접 개입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카다피 정권의 투아렉 보호와 장려정책은 리비아 남부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시도였지만, 그의 사망 이후 리비아는 투아렉을 포함한 베르베르들에 거의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기에 자구책을 강구해야 했습니다. 리비아에 피신하여 말리 투아렉 국가연맹(l’Alliance nationale des Touaregs Mali)의 수장인 이브라힘 아그 바한가(Ibrahim Ag Bahanga)와 추종자인 투아렉 독립운동가들은 리비아 군대를 나와 2011년 10월 16일
아자와드 민족해방운동(MNLA: Mouvement National pour la Liberation de
l’Azaward)을 결성하게 되고, MNLA는 투아렉의 독립과 그들만의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투아렉 독립운동전선의 이슬람 근본주의인 성향을 가진 이야드 아그 갈리(Iyad
Ag Ghali)는 MNLA의 지휘부에서 배제되자 안사딘(Ancar
Dine) 조직을 결성하고 샤리아(Sharia)에 근거한 국가설립을 목표로 독립적 운동을
개시하였습니다. 이는 극단주의 세력보다는 좀 더 온순한 형태(soft
sharia)의 이슬람정치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사딘과 MNLA의 관계는 종교적 해석, 이슬라미스트와의 관계, 종족내부의 인지도 및 독립운동의 전략적 비전에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대하여 투아렉 독립운동에 협력하여
전선을 구축하였습니다.
중동에서 유입된 근본주의와 결합은 지역안보 불안을 가중시키고…
각국의 국가통제가 미치지 않는 사헬사막지역은 그 특성상 북부 말리지역을 근거로
AQMI와 MUJAO 등 이슬라미스트 세력과 마약-무기
밀매 조직 활동의 온상이 되어 회색지대(Gray Zone)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말리정부의 개발정책 부재와 사막화로 지역 테러를 주도하고 있으며, 여러
개의 조직으로 분산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폭력적인 수단을 정당화하는 매우 극단적인 상황과 극심한 기근으로
경제적으로 피폐한 투아렉인들은 마약-무기 밀매(arm and
narco-trafficking)에 운반책으로 참여하게 되어 말리사헬지역은 전형적인 초국경(transnational)
무법지역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AQMI는 오사마 빈라덴(Osama
bin Laden) 이후 형성된 알카에다 프랜차이즈 조직이며 기존의 지역 살라피스트 그룹이었던 ‘예언과
투쟁을 위한 살라피스트 조직(GSPC: Groupement salafiste pour la predication
et le combat)’에 연원을 두고 있습니다. 사헬지역 대부분의 서구인들에 대한 인질극을
저질렀던 주요 지하드세력인 MUJAO는 북부말리지역에서 가장 폭력적이고 극단적인 이슬라미스트 세력이며
마그레브 이슬라미스트 세력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야드 아그 갈리(Iyad Ag Ghali)가 이끄는 이슬람주의적
성향의 안사딘(Ancar Dine) 조직의 성립과 영향력은 ‘아랍의
봄’ 이후 남하하는 극단주의 세력의 침투를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사헬지역을 포함한 마그렙지역의 이슬람근본주의 국가설립 프로젝트는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지역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점진적으로 이슬람문화를 정치 사회 문화영역으로 확대하려는 와하비스트(wahhabiste) 운동의
지속적인 영향권 아래 있었습니다.
사회경제적인 약자들인 지역 투아렉인들은 생존을
위해 근본주의운동에 참여하게 되고…
사헬지역 국가들이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혜택을 주지 못한 지역의 주민들은 중동부국의 충분한 재정지원에 매료되었고
이에 점차적으로 살리피즘(salafism), 와하비즘(wahhabism),
시이즘(chiisme) 등 이슬람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배우며 훈련된 엘리트들이 양성되어 반서구적인
이슬람순수주의 세력이 형성되었습니다. 이야드 아그 갈리(Iyad Ag
Ghali)도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슬라미스트적인 성향의 문화강화는
공교육을 대치하는 아랍학교의 계속적인 설립에서도 볼 수 있으며, 정치와 종교를 구분하지 않는 교육철학으로
인해 중장기적으로 다원적인 사회 통합에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3.3. 촉발요인: MNLA와 이슬람근본주의 세력이 남부말리 관문인 코나지역의 점령
독립을
시도하던 투아렉족의 아자와드 민족해방운동(MNLA: MouvementNational pour la
Liberation de l’Azaward)과 마그레브 지역 이슬람극단주의 세력이 연합하여 말리북부 주요 지역인 키탈(Kidal), 가오(Gao), 톰북투(Tombouctou) 지역을 장악하고 2012년 4월 6일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프랑스 정부는 상호방어밀약을 맺은 말리에 대한 직접 개입을 피하고 관망하며 여러 외교채널을 통해 MNLA세력
및 안사딘 조직과 물밑 협상을 수행하여 투아렉 민주정부수립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평화협상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점차 이슬람 마그레브 알카에다(AQIM)와 서아프리카 지하드
통일운동세력(MUJAO) 등 과격세력이 기존 MNLA세력을
배격하고 말리북부를 장악하였고 급기야 2013년 1월 10일, 이슬람테러세력과 결탁한 북부말리세력이 남부말리의 관문이 되는
코나(Konna)지역을 점령하였습니다. 전략요충도시인 코나지역이
함락되어 수도인 남부 바마코(Bamako)가 이슬람세력에게 넘어간다면 주변국에 미칠 안보불안과 그 파급효과는
막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주변국 및 관련국은 촉각을 세웠습니다. 말리군부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게 되었고
프랑스에게 파병요청을 하였다. 프랑스 정부는 이에 신속히 대응하면서 다음날인 1월 11일 유엔의 결의안을 채택하고 4,000여명의 프랑스 정예부대를 파견하여 세르발 작전(Operation
Serval)을 수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민주정부를 설립하고자 한 온건한 이슬람 세력인 MNLA도 안사딘과 이슬라미스트 세력에서 배제되어 동맹적 관계를 단절하고 프랑스 개입에 적극 찬성으로 돌아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U와 미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들도 상술한 것 처럼 지원이나 정보제공 등을 통해 국제적인 안보협력지원을 하게 이릅니다.
4. 분해해결의 어려움과 그 요인들
세르발 작전의 성공과 바르칸 작전의 실패…왜 말리는 계속 분쟁중인가?
분쟁초기 프랑스의 군사개입은 북부말리에서 분쟁의 확산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말리북부 국지적인 지역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 분쟁의 원인을 제거하고 종식하여 평화를 가져오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분쟁의 군사적이고 단기적인 요인을 제거했을뿐 우리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원인의 깊이와
종류는 매우 복잡합니다. 이런 복잡한 원인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평화를 가져오지 못할 것입니다.
2014년 7월 프랑스는
기존 세르발 작전을 종료하고 중장기적인 대테러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바르칸(Barkane)작전을 시작합니다. 또한 2017년
사헬지역의 5개국가(말리,
니제르, 모리타니아, 부르키나파소, 차도)가 연합하여 사헬G5를
결성하여 지역안보를 위한 군사협력체를 만들기에 이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리의 국내의 정치불안과
사헬지역의 납치, 감금, 테러 등의 안보불안은 끊임없이 지속되었습니다. 분쟁을 종식시키 못하는 몇몇 요인들이 있습니다.
4.1. 사헬지역의 회색지대화
사헬사막지역은 초국경지역으로 회색지대화되어 반란이
상존하고….
이슬람
테러조직의 특성상, 미국의 아프간 테러전쟁에서 보았듯이, 테러조직이
전투에서 패배하였다고 해서 전쟁이 종식된 것은 아닙니다. 계속되는 테러조직의 반란(insurgency)은 군인과 민간 사상자를 만들어내고 이는 중장기적 사회, 정치
불안의 요소가 될 것이며 이미 북부 수복 이후 지하디스트와 알카에다 및 IS의 국지전, 자살폭탄테러 등이 아직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특히 북부말리와 알제리, 니제르, 모리타니와
접경지대인 사헬사막지역은 테러리스트와 마약밀매 및 불법무기유통이 가능하며 국가통제가 미치지 않는 전형적인 초국경지역으로, 인접국의 협력과 국제사회의 효과적인 개입이 없을 시 테러조직의 완벽한 통제는 불가능할 전망입니다. 말리군의 정상화 및 주변국의 실질적인 국경관리능력이 필요한 시점이며 사태의 추이에 따라 프랑스의 개입 정도와
시간은 계속 늘어날 가능성이 있어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의 경우처럼 군사개입이 장기화되고 있습니다.
4.2. 말리정부 거버넌스역량 약화
말리 정치 거버넌스 정상화의 불투명…계속되는 쿠데타
2014년 세브발 작전의 성공 이후, 국제사회는
말리의 정치적 정상화를 위해 중재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투아렉인들과 말리정부, 반군-정부군 사이를 중재하고 주변국들과도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등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하지만 2018년에 재선된 케이타(Ibrahim
Boubacar Keita)대통령을 말리 반란군이 쿠데타로 감금하고 케이타 대통령은 자진 사태하게 됩니다. 국제사회는 말리의 쿠데타를 불법이라고 판단하고 유럽연합,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 시민사회단체들이 일제히 비난하고 공식적인 활동을 중단하게 됩니다. 이에
군사과도정부는 2020년 9월에 은다우(Bah Ndaw) 전국방장관을 대통령에 임명하고 고이타 대령을 부통령에 지명하여 민간정부를 꾸리게 됩니다. 국제사회도 제재를 해제하면서 인정하는 분위기였으나 2021년 5월 25일 부통령이었던 고이타 대령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은다우
대통령과 우안 국무총리를 파면했습니다. 이에 국제사회는 일제히 말리정부의 불법성을 비난하며 각종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는 특히 군사적인 개입을 철회하고 바르칸작전을 종료할 것이라고 강력히 경고하고
나섰습니다.
중장기적인 거버넌스의 회복이 중요해...
내부적으로 정치인의 부패와 군부의 득세로 매우 약화된 말리정부의 정치통치력과 말리군의 질적, 양적으로
저하된 군역량으로는 실질적인 안보유지가 불가능해보입니다. 또한 현재 이분된 말리국민들을 통합하여 민주적인
절차를 걸쳐 정당성을 확보한 정권을 설립하는 일이 시급하고 군은 시민정부하에 통솔되어야 하지만 남북이 분열된 말리사회를 통합하기 위해서는 중장기적인
프로세스가 필요하며 단순히 일회적인 선거로만 봉합할 수 없을 전망입니다. 자생적인 민주절차를 거쳐 정권을
형성할 동안 투아렉인들, 이슬라미스트의 반란이나 또 다른 쿠데타의 가능성이 상존하기에 말리 군경의 역량강화가
중요하고 국제사회의 안보협력이 더없이 중요한 시점이라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