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527 [아프로⑤] 카이로에서 제2의 기자 인생을 열다 [월드코리안뉴스]
관리자 / 2021-05-27 오후 3:46:00 / 1700북아프리카에 속하면서도 중동과 맞닿은 이집트는 두 대륙을 아우르는 중요한 거점 국가다. 이는 연합뉴스가 30년 가까이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 지부를 둔 이유다. 하지만 카이로는 생활 환경이 거칠고 분쟁이 잦은 탓에 기자들이 파견 나가기를 상대적으로 꺼리는 지부이기도 하다. 한상용 기자는 2011년 사회부 사건팀에서 근무하던 중 카이로 특파원 자리를 제안 받았다. 뜻밖의 제안이었지만 반복되는 일상에 타성이 생길 무렵이었던 만큼 덜컥 수락했다. 때마침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는 ‘아랍의 봄’이 휘몰아치며 반정부 시위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시리아와 리비아, 예멘 곳곳에서는 분쟁의 씨앗이 전쟁으로 번졌다. 한상용 기자는 분쟁 지역을 취재하는 일이 기자로서, 특파원으로서 경험하기 쉽지 않은 흔치 않은 기회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세계 외신 기자들과 경쟁하며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현장을 보고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무엇보다도 국제 이슈를 우리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전달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스스로 부쩍 성장했고 스스로 ‘제2의 기자 인생’을 열었다고 한다.
카이로, 그 강렬했던 첫인상
2011년 사회부 사건팀 중부라인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매일 새벽에 출근한 경찰서에서 대기하다가 사건 사고가 접수되면 현장에 나가 취재했다. 연합뉴스는 통신사로서 그 어떤 언론사보다 정확하고 빠르게 많은 기사를 생산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늘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해 가장 늦게 철수하는 일이 반복됐다. 국내 언론사 중 가장 힘들다는 통신사에서도 가장 힘든 팀에 있다 보니 고달프기도 하고,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기도 했다. 무언가 돌파구를 찾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 당시 사내에서 일본어를 전공한 기자가 나 하나뿐이란 얘기도 들었다.
그 이유 때문인지 동일본 대지진 후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했을 때 일본에 파견되기도 했다. 한때 일본 특파원으로 나가는 일을 목표 삼아 일본어 공부에 매진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회사는 이집트 카이로 지부로 나갈 것을 제안했다. 카이로 특파원을 교체할 시점이 되어 사내에서 후임자를 찾기 위해 모집 공고를 냈는데 지원자도 없었는 터였다. 회사는 카이로 특파원 출신의 당시 사회부 부장에게 부서 내에서 후임자를 물색하라는 특명을 내렸다고 한다.
당시 북아프리카와 중동은 ‘아랍의 봄’이라는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었다. 어차피 나가면 대규모 시위, 폭동, 테러 등의 사건 사고를 취재해야 하니 사건팀 기자를 보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부장은 나를 포함한 사건팀 기자 여러 명에게 의사를 물었고, 그중 유일하게 내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미지의 세계’로만 상상하던 이집트였지만 나 혼자만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카이로 특파원 제안을 받은 당일 전화로 넌지시 운을 띄우자 아내는 의외로 “재미있겠다. 지원해 봐.”라고 반응했다. 물론 아내는 그때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정세가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듯 했다. 나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내게 다가온 ‘돌파구’에 한껏 부푼 마음을 안고 그해 7월 카이로를 향했다. 가족은 그로부터 4개월 뒤 합류했다.
강렬한 태양이 내리쬐던 7월의 어느 날. 카이로 국제공항에 도착한 뒤 비행기에서 내려 첫발을 디딘 카이로는 혼돈 그 자체였다. 공항 터미널 안에서 경찰들이 아무렇게나 담배를 태우는가 하면, 짐을 들어주겠다고 모여든 사람들로 정신이 산란했다. 겨우 전임자를 만나 차를 타고 이동하는데 차선도 신호등도 없는 도로를 차들이 경주하듯 내달렸다. 불현듯 이집트에서 교통사고로 매년 2만여 명이 목숨을 잃고 부상자는 셀 수 없다는 과거에 읽었던 기사가 머리를 스쳤다. 아니나 다를까 숙소로 가는 길에 전복된 차량을 목격했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짧지만 강렬했던 도시의 무질서한 분위기에 앞으로 3년을 잘 버틸 수 있을지 순간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곧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취재 경험도 맛볼 수 있겠구나’란 상상을 하니 다시 마음이 들뜨고 가뿐해졌다. 전임자를 따라다니며 이국적인 도시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며 짜릿한 모험이 시작될 것 같은 기분이 점차 증폭됐다. 일주일간의 인수인계를 마치고 전임자가 떠난 후에야 비로소 환상이 걷히며 내 처지가 실감났다. 이집트대사관, 코이카, 코트라 직원, 한국 교민 등 취재원을 소개받기는 했으나 앞으로 나혼자 기사를 기획하고 취재하고 작성하려고 하니 막막함이 가슴을 조여 왔다.
사진 기자, 영상 취재기자도 없어 사진과 동영상을 촬영하는 일 또한 온전히 내 몫이었다. 출국하기 전 약 3주간 국제부에서 근무했지만 북아프리카와 중동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고 무엇이 핵심 이슈로 부각했는지 파악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두 명 이상 체류하는 곳에만 특파원 사무실이 마련되는 터라 나 혼자 쓰는 사무실도 마련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두바이 지부에 파견된 회사 선배가 있어 함께 상의하며 당장의 취재 방향을 결정할 수 있었다.
나는 특파원이다
첫 해외 파견 근무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하던 8월 중순, 회사에서 급하게 지시가 내려왔다.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Tripoli)가 반군에 함락됐으니 빨리 가서 현장을 취재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어떻게 가야 하는지는 회사에서도 알지 못했다. 리비아는 이집트와 국경을 맞닿은 이웃 국가이지만 당시 서방 국가의 공습이 매일 이어지는 여행 금지국가였다. 이집트대사관에 도움을 청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리비아 트리폴리 주재 한국대사관도 안전상 튀니지로 철수했다. 결국 차선책으로 리비아 정세에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카이로 주재 교민을 수소문했다. 다행히 운이 따랐다.
리비아 서쪽에 위치한 튀니지로 먼저 비행기를 타고 이동한 후 육로로 들어가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더불어 카이로에 있는 한 유학생이 튀니지에 거주하는 또 다른 한국인 유학생을 연결해주어 그를 통해 현지인 가이드를 소개받았다. 튀니지에 도착하자마자 가이드를 만나 그의 차를 타고 무작정 국경을 향했다. 튀니지에서 리비아로 넘어가려면 비자가 필요했지만 회사에서 한시바삐 가라고 하니 일단 몸으로 부딪혀 보기로 했다. 하지만 역시 비자 없이 국경을 통과할 수 없었다. 나는 우선 국경에서 현지 분위기를 전하는 르포 기사를 쓰고 리비아에서 간신히 빠져 나온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동시에 검문소를 거치지 않고 국경을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을 다시 수소문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나름 수확을 얻었다.
남부 지역이 이미 무정부 상태여서 비자 없이도 들어갈 수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그 즉시 렌트한 차를 타고 남쪽을 향해 달렸다. 우여곡절 끝에 남쪽 국경을 통과해 다시 트리폴리까지 올라가는 데 장장 8시간이 걸렸다. 흙먼지 날리는 사막을 달리며 비행편을 편도로 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사리 입성한 트리폴리는 유령 도시 같았다. 전쟁이 지나간 자리는 이미 폐허로 변해 있었다.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반군들은 자축의 의미로 어디서든 시시때때로 총을 쏘아 올렸다. 휑한 도심에서 총성만이 뚜렷하게 내 귓가를 울렸다. 먼저 기사를 송고할 수 있는 숙소를 찾아야 했다.
가장 안전하리라고 여긴 고급 호텔들은 이미 모든 방이 외신 기자나 반군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호텔 직원을 상대로 알음알음하여 빈 방이 있는 곳을 찾았는데, 총을 찬 반군들이 들락거리는 묘한 분위기의 호텔까지 가게 됐다. 알고 보니 그곳은 무장 반군 대원들이 주요 거점으로 쓰는 호텔이었다. 승리에 도취된 반군들은 우리를 반겼지만, 무장한 그들이 언제 어떻게 태도를 바꿀지 몰라 내심 두렵기도 했다. 또 카다피 잔당 세력에 속하는 저격수가 여전히 도시 곳곳에 숨어 반군을 노리고 있다고 하니 시내를 돌아다닐 때 한시도 방심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