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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위클리(2025-24호): 모국어를 통해 정신의 갱신을 노래한 작가 응구기 와 씨옹오

관리자 / 2025-06-27 오후 1:20:00 / 28

“아프리카, 고아가 되다.” 2025년 5월 28일에 탈식민주의 문학의 살아 있는 전설이었던 케냐의
No.24(2025.06.27.)

한·아프리카재단 조사연구부가 매주 전하는 최신 아프리카 동향과 이슈


       
     
   
       
     
   

모국어를 통해 정신의 갱신을 노래한 작가 응구기 와 씨옹오

       
     
   

이 석 호(카이스트 연구교수/사단법인 아프리카문화연구소장)

+ “아프리카, 고아가 되다.”

2025년 5월 28일에 탈식민주의 문학의 살아 있는 전설이었던 케냐의 작가 응구기 와 씨옹오(Ng?g? wa Thiong’o)가 미국 조지아에서 영면에 들었다. 향년 87세였다. 그의 부고가 전해진 날, 케냐의 한 일간지는 “아프리카는 이제 고아가 되었다”고 애도했다. 그는 문학을 무기로 삼아 식민 지배와 그 잔재 그리고 독립 이후에도 지속된 권력의 폭력과 자본의 착취를 강렬하게 성토한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그의 타계는 단지 한 개인의 생물학적 종결이 아니다. 세계문학사의 관점에서 볼 때, 비서구의 문학과 언어, 그리고 탈식민 사유가 힘겹게 관철해 온 한 시대의 문학적 이상이 막을 내리고 새로운 시대가 새로운 막을 여는 사건이었다.


응구기는 단지 펜으로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니었다. 탈식민 시대 이후 비서구의 문학장이 일종의 공리의 형태로 공유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문학적 실천으로 조직하고 견인해 간 작가이자 사상가였다. 그의 문학은 식민성과 언어, 민중성과 권력, 그리고 문학과 정치의 관계를 발본적으로 다시 사유하면서 이를 ‘누구의 언어로 전달할 것인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그리고 그의 문학은 이 질문을 평생의 화두로 붙들고 스스로 그 답을 찾아 나선 모색과 실천의 여정이었다.

+ 출생과 초기 배경

응구기는 1938년 케냐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절 카미리투(Kamiriithu)라는 기쿠유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식민 군대에 의해 청각장애인이었던 이복형이 살해되는 경험을 겪으며 식민 폭력의 뿌리를 몸소 체험했다. 1960년대 초 <검은 은사>(Black Hermit)라는 단편으로 아프리카 문단에 이름을 알린 그는 이후 『울지 말아라, 아이야』(Weep Not, Child)를 비롯해 『샛강』(The River Between) 그리고 『한 톨의 밀알』(A Grain of Wheat)과 『핏빛 꽃잎』(Petals of Blood) 등속의 주옥같은 작품을 영어로 상자하면서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로 우뚝 선다.


그러나 상기한 작품들을 통해 형식과 내용 면에서 유럽 작가들과 미학적 변별점을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고 판단한 응구기는 본격적으로 언어/모국어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언어/모국어는 문학의 원초적 질료로 독자와의 소통을 매개하는 가늠자다. 그는 소설을 영어로 쓴 덕에 지구촌의 많은 독자에게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정작 그가 헌정과 소통의 대상으로 삼았던 케냐의 기층 민중에게 그의 소설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큰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그가 사용한 소설의 언어/영어가 케냐의 일반 민중들이 상용하는 일상의 언어와 여러 가지 면에서 괴리감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크게 각성한 그는 제임스 응구기라는 필명을 버리고 ‘응구기 와 씨옹오’라는 고유명을 회복하는 한편, 영어로 창작하는 관행마저 포기하고 토착어인 기쿠유어로 글을 쓰겠다는 급진적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식민주의자의 언어로는 정신의 해방이 불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제국의 언어인 영어를 버리고 토착어인 기쿠유어로

미구에 탈식민주의의 고전이 되는 『정신의 탈식민화』(Decolonizing the Mind)를 쓰게 된 계기로 토착어의 존재론적 가치를 확신한 응구기는 영어라는 언어의 이중성을 직면하게 된다. 그는 영어라는 이름으로 환기되는 서구의 근대가 기술적 타협 내지는 조건부 조율의 대상은 될지언정 무조건적 몰입의 대상은 아님을 지적한다. 다시 말해, 영어는 토착어로 쓴 작품을 대외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을 때 번역어로 활용하면 그만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 판단은 이후 아프리카는 물론이고 비서구의 많은 창작자에게 ‘언어의 전회’를 둘러싼 혁명적인 사고의 전환을 가져다준다.


응구기 문학이 ‘언어의 전회’를 가장 특이한 이정표로 거느린 이유가 있다. 식민 권력이 원하는 것이 단순한 의미의 영토적 지배가 아님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식민 지배는 땅의 지배로 완성되지 않는다. 식민지인의 언어와 상상력을 지배해야 동의와 합의에 기반한 항구적 지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언어를 매개로 한 유연한 지배를 응구기는 “문화 폭탄”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그는 서구가 이 “문화 폭탄”을 활용해 피지배자의 정신적 식민화를 도모할 뿐만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고 구성하는 인식론적 틀마저 왜곡하고, 이를 통해 역사적 기억과 정체성을 훼절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가 보기에 제국의 언어로 글을 쓰는 행위는 “자발적 예속”을 스스로 정당화하는 “기이한 모순”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응구기는 연극으로 눈을 돌려 1977년에 독립 이후 케냐의 새로운 엘리트를 비판한 작품인 『결혼하고 싶을 때 결혼할래요』(Ngaahika Ndeenda)를 무대에 올린다. 이 작품은 토착어로 구연된 집체극 형태의 공연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류의 서양 연극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미학적 장관을 연출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당대 케냐 위정자의 심기를 거슬렸다는 이유로 그는 불법 체포되어 초대형 감호소에서 일 년여 남짓한 세월을 지내게 된다. 수감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질이 좋지 않아 오히려 글을 쓰기에는 더욱 유용했던” 화장실 휴지에 한국 문학과 관련해서도 전대미문의 영향 관계를 드러낸 걸작 『십자가 위의 악마』(The Devil on the Cross)를 집필하기에 이른다.

+ 응구기와 한국 문학의 인연

『십자가 위의 악마』는 응구기가 ‘언어의 전회’ 이후 토착어로 쓴 첫 번째 소설로 한국의 시인 김지하의 영향을 짙게 드러낸 작품이다. 응구기는 기실 아프리카 작가로는 드물게 70년대부터 한국의 정치 상황과 이를 문학적으로 표현한 한국 문학에 남다른 관심을 줄기차게 현상한 작가이다. 그는 일찍이 『작가와 정치』(Writers in Politics)라는 작품집을 통해 박정희 유신 독재를 성토하던 한국 작가들에게 심정적 지지를 보낸 바 있다. 이를 계기로 한국 문학에 관심의 촉수를 더욱 높게 세우고 있던 그는 김지하의 『오적』(Five Bandits)과 『비어』(Groundless Rumor)를 만나게 된다. 이 만남을 문학적 형태로 구현한 작품이 『십자가 위의 악마』이다.


필자는 2005년 대산문화재단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응구기와 <세계화와 탈식민주의>를 주제로 대담을 한 바 있다. 그 자리에서 필자가 물었다. 『십자가 위의 악마』가 김지하의 『오적』을 케냐의 문맥으로 확장한 것 아닌가? 다시 말해, 케냐판 ‘오적’이 아닌가? 응구기는 담백하게 그 사실을 인정했다. 김지하를 읽을 무렵에 그는 미학적 수렁에 빠져 있었다고 말했다. 저잣거리 민초들의 판소리 가락을 서사 형식으로 삼아 권력자들의 위선을 놀랍도록 박력 있게 형상화한 김지하의 시가 그를 구제했다고 고백했다. 이는 세계문학의 새로운 지도 만들기와 관련해 매우 시의적절한 전범으로 서구를 우회하지 않고도 유의미한 남-남 협력이 가능함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응구기의 ‘언어 전회’는 창작 언어의 교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좀 더 발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지식 생산의 탈식민화 전략을 상징한다. 여느 작가에게나 토착어는 단순한 의미의 모국어 혹은 민족어가 아니다. 공동체 내부의 정동과 기억이 살아 숨 쉬는 매체이자 장소이다. 그런 의미에서 응구기의 작품은 제국의 언어가 회칠한 공동체의 역사와 얼굴을 갱신해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인식의 도구로 전유한 ‘오래된 미래’의 표본인 것이다.

+ 응구기의 유산과 탈식민 문학의 미래

응구기의 문학적 유산은 단지 작품의 형식과 내용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서구의 근대가 왜곡한 세계문학의 장 안에 음전하게 포섭되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비서구 작가의 실존적 조건을 적극적으로 투사하여 문학의 존재론과 사회적 기능을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하도록 촉구하는 일련의 정치적이고 미학적인 기획을 실천한 작가였다. 동시에 그는 모국어/토착어를 회복하고, 기억을 복원하여, 저잣거리 민중의 언어로 역사를 다시 쓰는 문학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실험한 작가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문자로 구성된 소설 텍스트가 아니다. 그 텍스트의 행간을 절절하게 횡단하는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질문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은 어떻게 세계를 바꿀 수 있는가? 비서구의 문학적 연대는 가능한가?


앞서 가볍게 소개했듯이, 응구기는 한국 문학에 대해 깊은 존중과 공감을 표명한 바 있다. 2016년에 <박경리 문학상>을 수상할 당시, 그는 『토지』를 “민중과 언어 및 역사와 장소에 대한 깊은 서사적 탐구”라 평가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과 몇 해 전 미국에서 함께 한 낭독회에서도 “한국 문학은 시적이고도, 저항적이며, 민중의 상처를 가시화하는 언어적 힘”을 지니고 있다고 상찬했다.


응구기가 한국 문학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 이유는 역사적 친연성(親緣性) 때문이다. 식민지 시절의 한국 작가들도 모국어/조선어를 보존하고 유지하려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겪었다. 언어가 정체성의 본질이자 문화적 저항 혹은 해방의 최종심급임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해방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4.19를 전후로 하여 일본어 세대와 한글 세대가 문학장의 언어적 헤게모니를 놓고 충돌했다. 이후 한국이 미국의 영향권 아래 놓이면서 영어가 일본어의 자리를 대리했다. 지구 저편에서 응구기가 행한 선택과 결단은 한국 문학이 차제에 나아갈 방향과 관련해 유용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한국 문학은 응구기가 대변하는 아프리카 문학과 유사한 역사적 조건 아래에서 유사한 문학적 실천을 전개해 왔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식민지를 경험한 제 문학은 유사한 궤적을 밟았다. 그런 의미에서 응구기가 한국 문학과의 교감을 통해 일찌감치 선취한 미학적 돌파구 찾기 행위는 오늘날 지구촌 남반구 문학 간의 연대와 관련해서도 흥미로운 조타수 역할을 하고 있다. 서구를 중심축에 놓지 않고도 문학적 차원에서의 남-남 연대가 충분히 의미 있는 효과를 낳을 수 있음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이는 작금의 세계문학이 더 이상 서구의 언어와 제도 그리고 시장의 문법에 좌우되지 않음을 방증한다. 서구가 강제한 문학적 질서와 배치를 넘어 비서구의 생활세계가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서사 전략을 매개로 세계를 새롭게 구성하고 호출하는 감각이 빛을 발하는 시대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우리가 할 일은 명확하다. 응구기의 유산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계승하는 것이다. 그리고 집요하게 다시 묻는 것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누구의 언어로 문학을 해야 하는가?

  이석호



 KAIST 인문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
사단법인 아프리카문화연구소장
아시아-아프리카 예술가연맹(A-AAA) 공동의장
『아프리카 탈식민주의 문학론과 근대성』 집필

씨옹오 와 응구기. <정신의 탈식민화>. 이석호 역. 아프리카. 2013.05.26.

이석호 외. <월경하는 지식의 모험자들>. 한길사. 2003.06.16.

응구기와 이석호 대담. <한겨레신문>.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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