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남아공의 토지수용법이 백인에게 차별적인 “대대적인 인권 위반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판하며 남아공에 대한 모든 재정 지원을 중단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 일론 머스크(Elon Musk) 테슬라 CEO 등 일부 인사 또한 이 법이 남아공 경작지의 약 80%를 소유한 백인의 재산권을 침해할 수 있다며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시릴 라마포사(Cyril Ramaphosa) 남아공 대통령은 지난 1월, 당국이 공공 목적 혹은 공익을 위해 토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그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는 토지개혁법안(Land reform bill)에 서명한 바 있다. 라마포사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미국 정부가 새 법을 보다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며 “남아공 정부는 그 어떤 땅도 몰수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해당 법에서 논란이 되는 ‘보상 없는 수용’ 조항은 특정한 경우*에 한하며 최종 판단은 법원이 내린다는 입장이다. 즉, 이 법은 아파르트헤이트 시대 종식 이후의 ‘자발적 매매’ 모델(Willing buyer, willing seller model)**을 대체하며, 시장 가격 외에도 토지의 역사적 배경과 현재의 용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공정한 보상을 책정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빈센트 마궤니아(Vincent Magwenya) 남아공 대통령실 대변인은 “수 세기에 걸친 억압적이고 잔인한 식민주의와 아파르트헤이트의 파괴적인 유산으로 우리 헌법은 과거의 병폐를 시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며 머스크에게 남아공 대통령과 건설적으로 대화할 것을 촉구했다.
* 법에 따라 토지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사용되지 않고 투기적 목적으로만 보유한 경우거나 버려진 토지의 경우 등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고 ‘땅이 재분배되어 공공 이익에 이바지한다’는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만 허용한다.
** 토지 소유자가 자발적으로 판매 의사를 밝히면, 정부가 시장 가격으로 토지를 구매하는 방식으로 백인 소유 농지를 흑인에게 재분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이후 도입된 것으로, 정부가 토지 소유자와 시장 가격을 협상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시장 동향에 맞춰 자유롭게 가격을 설정할 수 있고, 복잡한 행정 절차를 거쳐야 하는 등의 요인으로 인해 토지 재분배라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고, 2017년 기준 백인들은 여전히 농장과 농업 용지의 약 75% 이상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점으로 남아공 정부는 토지 개혁법을 추진하게 되었다.
많은 경제학자와 전문가는 트럼프의 발언과 행동이 해당 법률에 대한 오해라고 지적한다. 머스크는 해당 법이 반(反) 백인주의적일뿐 아니라 라마포사 정부를 향해 “2023년 백인 농부들을 대상으로 한 대량 집단학살*을 용인했다”고 비난했는데, 이에 대해 남아공 전문가들은 백인 농부 몇 명이 살해된 경우가 있으나 이는 ‘백인 증오’ 현상이라기보다는 세계 최악 수준의 남아공 폭력 범죄가 반영된 결과로 해석한다. 더불어 남아공에서는 통계상 하루 약 70명이 살해되며 대부분의 피해자는 흑인이라고 덧붙였다.
* 일론머스크는 남아공의 야당인 경제자유투사당(Economic Freedom Fighters: EFF)의 줄리어스 말레마(Julius Malema)가 “보어를 죽여라, 농부를 죽여라(Kill the Boer, Kill the Farmer)” 구호를 외치는 2년 전 영상에 대해 “백인 농부들을 죽이라고 외치는 것”이라고 해석하며 남아공 정부가 “백인에 대한 집단 학살을 공개적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른 주장으로, 라마포사 대통령은 머스크와 직접 대화를 통해 오해와 왜곡을 해소하려 한 바 있다.
라마포사 대통령실은 이 법이 이미 수년 동안 논의되어왔으며 “몰수하려는 장치가 아니라 헌법적으로 권한이 주어진 합법적 절차”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즉 헌법 지침에 따라 평등하고 정의로운 방식으로 토지에 대한 공공 접근을 확보하는 과정이라는 의미다.
이러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미 남아공과 미국의 관계는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남아공 정부는 미국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으나 트럼프 정부는 이에 응답하지 않고 G20 장관급 회의에 미국 국무·재무장관 불참, 에이즈 퇴치를 위한 대통령 긴급계획(PEPFAR)’ 송금 차단* 등의 행보로 일관하고 있다. 남아공은 미국의 PEPFAR 원조 사업을 통해 자금 지원을 받아왔다. 린다-게일 베커(Linda-Gail Bekker) 데스몬스 투투 HIV센터(Desmund Tutu HIV Centre) 최고운영책임자는 “자금 손실로 10년간 50만 명 이상의 불필요한 사망자가 발생하고 최대 50만 건의 새로운 감염이 발생할 것”이라고 밝혔다.
* 2월 20일 트럼트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해외 원조를 중단하며 송금이 차단된 데 이어, 26일 현지 HIV 단체들은 보조금이 영구 중단되었다는 서한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남아공에는 HIV 감염 환자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준으로 약 800만 명 있으며, HIV/AIDS 프로그램 연간 예산은 23억 달러, 우리 돈으로 3조4천억 원 규모다. 미국으로부터 PEPFAR 원조 사업을 통해 연간 약 4억 달러를 지원받았다. PEPFAR 사업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해외 원조프로그램으로 꼽히며, 연간 약 550만 명의 환자가 PEPFAR이 제공하던 항레트로바이러스치료(Anti-retroviral treatment)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2003년 PEPFAR 출범 후 미국 정부는 전 세계 HIV/AIDS 대응에 1천 억 달러(약 146조 원)를 투자해 2,500만 명 이상의 생명을 구했다.
마코 루비오(Marco Rubio) 미 국무부 장관은 지난 2월 5일 “남아공은 매우 나쁜 일을 하고 있다”며 “내 임무는 미국의 국익을 증진하는 것이지 납세자의 돈을 낭비하거나 반미 감정을 감싸주는 게 아니다”라고 지적하며 G20 외교장관회의에 불참했다. 스콘 베센트(Scott Besent) 미 재무부 장관 역시 엑스(X)를 통해 G20 재무장관회의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고 불참했다. 장관급 불참은 미국이 항의하는 남아공 토지수용 정책과 회의 의제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미국을 필두로 일본, 유럽연합(EU), 중국, 인도 등 주요 회원국 재무장관도 불참한 G20 재무회의에서는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기후 정책이 화두가 되었고, 의장국인 남아공이 폐회하며 보호무역주의에 저항한다는 의장요약을 발표했지만 공동성명에 대한 합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이긴 하지만 향후 미국이 관여하고 있는 모든 다자기구에 대한 탈퇴를 검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G20 장관급 불참도 이러한 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풀이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