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17 [아프로41] 아프리카의 주식에 버섯의 영양을 입히다 - 정지현 머쉬앤 대표 [월드코리안신문]
관리자 / 2022-11-17 오후 5:25:00 / 1355‘Af-PRO’는 국내 아프리카 전문가들의 모임이다. 외교부 한·아프리카재단에서는 이들의 활동을 소개한 책을 두 권 펴냈다. ‘Af-PRO, 한국과 아프리카를 잇다’는 제목의 단행본들이다. 한·아프리카재단의 허락을 받아, 이 책의 내용을 연재한다.[편집자주]
한국농수산대학 버섯학과를 졸업한 정지현 대표는 말라위에 소재한 버섯연구소에 책임연구원으로 부임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 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과 함께 1년간 ‘버섯 재배를 통한 아프리카 현지인들의 소득증대’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현지인들의 농업자립을 도왔다. 말라위 농민들은 부가가치가 높은 양송이버섯을 재배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말라위를 포함한 중남부아프리카에서 양송이버섯 재배에 성공한 경우를 찾기는 힘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전정신을 발휘한 정지현 대표는 몇 달간 연구소에 살다시피 하며 양송이버섯에서 종균을 채취하고 생장과정을 면밀히 관리했다. 성공 확률이 매우 낮은 고난도의 작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첫 농사에 양송이버섯 100kg을 수확했다.
이 성공을 통해 정지현 대표는 아프리카의 식량문제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버섯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누트리-애그리(Nutri-Agri)’라는 현지 법인회사를 설립하고 씨마에 버섯을 주입한 ‘프리미엄 씨마(Premium N’shima)’를 출시했다. 옥수수가루를 물에 개어 찐 씨마는 아프리카대륙에서는 우리나라의 쌀밥과도 같다. 아프리카 사람들 대부분이 씨마에 채소나 육류를 곁들여 식사를 한다. 그런데 이때 문제는 씨마가 옥수수와 물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탄수화물 외에 다른 영양소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아프리카대륙의 영양결핍과 영양불균형 문제가 국제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있는 이유 중 하나이다. 정지현 대표는 균형잡힌 식재료를 만들기 위해 옥수수알에 버섯 종균을 주입하는 시도를 했다.
말라위영양협회의 분석 결과 실제로 단백질, 무기질, 섬유소 등이 월등히 높아졌다. ‘프리미엄 씨마’를 하루 두 끼만 먹어도 탄수화물은 물론 단백질, 무기질, 섬유소 등을 일일 권장량까지 섭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정지현 대표는 프리미엄 씨마의 단가가 저렴하고 무엇보다 현지인들에게 익숙한 식재료인 만큼 이를 적극 활용하면 아프리카대륙의 영양불균형 문제 해소에 기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UN조달본부(UNPD: United Nations Population Division)로부터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자는 제안을 받기도 한 정지현 대표는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 본격적으로 아프리카 시장에서 프리미엄 씨마를 상용화할 계획이다.
버섯 전문가를 꿈꾸다
나는 어려서부터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야생식물과 버섯 등을 관찰하기를 좋아했다. 자연 속 채소와 버섯을 채집하고 맛보는 즐거움에 설렜지만, 이름 모를 풀이나 버섯을 먹고 다닌다고 부모님의 걱정을 사기도 했다. 또래들과 달리 다소 엉뚱한 취미를 가진 나였지만 자연 속에서 나는 앞으로의 진로를 찾았다. 야생 식물을 채집하는 일도 넓게 보면 농업에 속했으며 농업은 어느 나라나 국가의 근간이 되는 산업이었다.
특히 기후변화로 인해 식량안보가 대두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농업이 다시 한 번 주목받고 있다. 처음에는 야생 약초나 버섯을 채집하는 심마니를 생각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어린 내가 심마니가 되는 것보다는 농업을 전문적으로 배워 자신만의 노하우를 키우라며 한국농수산대학에 입학하기를 권하셨다. 한국농수산대학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농·어업 분야의 청년인재를 양성하는 국립대학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고 나만의 농업기술을 개발해보고자 한국농수산대학에 진학했다.
한국농수산대학은 농·축·수산업 각각에 대해 세부적으로 학과가 나뉘어져 있다. 나는 어느 학과를 지원할지 고민했다. 애초에 약초를 캐는 심마니를 꿈꿨으니 특용작물학과를 가는 것이 맞을 듯했지만 이왕 전문적으로 연구를 할 거라면 인류의 식생활의 변천에 따라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온 균류를 연구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머릿속에 버섯이 떠올랐다. 버섯은 담자균류와 자낭균류로 이루어진 고등균류에 해당한다.
균류는 인류와 오랜 시간 함께해왔기 때문에 식재료로 활용되는 버섯이야말로 우리 생활 가장 밀접한 곳에서 유익하게 활용되리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렇게 나는 동물도 식물도 아닌 이 신비로운 생명체의 매력에 이끌려 버섯학과를 선택했다. 1학년 때는 모든 학생이 학교에서 농사를 지어야 했다. 나는 교내 연구소에서 직접 균을 배양하여 버섯을 재배하면서 버섯의 생태를 조금씩 배워 나갔다. 2학년 때는 경기도농업기술원에서 연수를 받으며 보다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도 전수받았다.
개발협력에서 답을 찾다
우리나라는 세계 여느 선진국만큼이나 선진화된 농업환경을 구축하고 있다. 농업생산의 기계화 및 자동화 설비를 통해 대량생산체계를 갖추었고 최근에는 사물인터넷(IoT)을 접목한 스마트팜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농업의 첨단화로 생산성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반면 상대적으로 자본규모가 작은 영세농가들은 점점 경쟁에서 밀려났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특출난 아이디어가 없는 한 농업으로 창업하는 것은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대학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버섯의 생태를 열심히 연구했는데, 그 대부분의 과정을 기계가 대신하다 보니 내 연구에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버섯에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버섯농업을 개발하고 우수한 종균과 최적의 재배환경을 더 깊이 연구하고 싶었다. 나는 스스로 창업을 하지 않고 농업 분야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고민하던 중 농촌진흥청 홈페이지를 통해 개발도상국에서 버섯 종균 제조와 재배, 생산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할 연수생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게 되었다. 아직 농업 선진화가 많이 진행되지 않은 개발도상국이라면 버섯 종균과 재배환경을 직접 실험하고 연구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여 프로젝트에 지원했다.
나는 연수생으로 선발되어 서남아시아에 위치한 스리랑카로 6개월간 연수를 떠났다. 당시 스리랑카의 농촌 환경은 내가 상상한 대로 대부분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버섯종균 재배에 필요한 ‘무균사(Clean Bench)’라는 시설이 없어서 공기를 살균하기 위해 사방에 촛불을 켜 놨다. 그리고 버섯 종균을 배양하는 배지를 만들기 위해 일일이 손으로 볏짚과 동물 배설물을 섞어 발효시켰다. 마치 사진으로만 접하던 우리나라 1970~80년대 농촌 풍경 속으로 들어간 듯했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오랜 농사 경험과 그로부터 축적된 지혜, 몸에 익은 감각으로 버섯을 재배했다.
우리는 우선 섣불리 개입하지 않고 현지 자연환경에 따라 지역 사람들이 발전시킨 농법을 존중하고 관찰했다. 스리랑카 버섯연구소의 연구원들과도 활발히 교류하며 우리가 가진 기술 중 현지 환경에 맞게 생산성을 높이는 기술이 있는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우리의 여러 제안들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였고 새로운 도전을 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반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현지 환경에 맞춰 농법을 개선하며 문제를 해결했다. 그 과정에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희열과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기계에 의존하기보다는 인간의 감각으로 재배 방법과 작물의 상태를 이해하는 그들의 노하우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쉽게 접할 수 없는 무형적 자산이었다. 그때의 경험을 통해 국제개발 분야 농업전문가가 되는 방향으로 진로를 그리기 시작했다.
진로를 확실히 정한 뒤 나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학과생활을 했다. 덕분에 우수한 성적은 물론 공모전에서도 수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해외연수 기회를 얻어 다양한 버섯 재배 환경과 기술을 보기 위해 스페인까지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한번은 일본 연수가 결정된 시점이었다. 일본으로 떠날 날을 기다리는데 지도교수님께서 말라위 연수를 제안했다. 지도교수님은 KOICA와 함께 남부아프리카에 위치한 말라위에서 ‘버섯 재배를 통한 아프리카 현지인들의 소득증대’ 프로젝트를 8년째 진행하고 있었다.
내게 연수를 제안했을 때는 장기 프로젝트의 종지부를 찍는 시기였다. 마지막으로 말라위를 찾아 프로젝트의 성과를 최종점검하고 전문적인 연구지식과 새로운 경험을 쌓을 것을 추천했다. 목전에 둔 일본 연수보다 더 기대가 컸다. 스리랑카 개발협력 프로젝트에 참가했을 때 가장 많이 배우고 성취감도 컸던 나는 말라위 연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말라위로 출국하는 날과 일본에서 귀국하는 날이 겹쳐 집에 들르지도 못한 채 공항에서 바로 교수님을 만나 출발해야 했지만 나는 피곤함을 느낄 새도 없이 설레는 마음을 안고 말라위로 향했다.
말라위와의 인연이 시작되다
말라위에 발을 디딜 때까지 나는 아프리카대륙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는 것이 없다보니 위험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더 난리였다. ‘야생 동물로부터 습격당할지 모른다’는 등의 편견으로 인해 나를 걱정했다. 하지만 원래 겁이 없는 편이기도 하거니와 2주라는 짧은 기간 동안 지도교수님을 비롯해 여럿이 함께 가는 출장이었기에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말라위에서 만난 사람들은 지인들의 우려가 무색할 정도로 밝고 착하며 친절했다. 치안을 걱정할 필요도 없이 그야말로 평화로운 곳이었다. 특히, 말라위 호수(Lake Malawi)가 정말 아름다웠다. 세계에서 아홉 번째, 아프리카대륙에서 세 번째로 큰 말라위 호수가 자아내는 목가적인 풍경도 아름다웠고 다양한 수상 스포츠도 즐길 수 있어 정말 좋았다.
다만, 연수 일정이 빠듯하여 여유롭게 물놀이를 즐길 시간이 부족했던 점이 개인적으로 아쉬움으로 남았다. 장기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시점이었던 만큼 교수님께서는 현지인들과 하나라도 더 나누고 싶은 마음에 주말까지 업무 계획을 촘촘히 짰다. 우리는 표고버섯 원목 재배법을 전수하기 위해 직접 나무 기둥에 드릴로 구멍을 뚫고 종균을 심는 시범을 보였다. 또한 국내에서 챙겨 간 양송이버섯 종균으로 양송이버섯 상자 재배법도 알려주었다. 그렇게 일정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지도교수님으로부터 다시 말라위 소식을 접했다. 안타깝게도 전수한 기술이 현지에 잘 정착되지 못했고 현장에서 관리 감독할 인력이 필요하다는 소식이었다. 그래서 교수님께서는 내게 말라위에 갈 생각이 있는지 넌지시 물었다. KOICA가 지원하고 굿네이버스(Good Neighbors)가 집행하는 사업이었다. 거의 자원봉사자의 역할을 해야했고 일정한 보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충분히 가치가 있고 무엇보다 내가 잘 할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큰 고민 없이 1년간 다녀오기로 결심했다. 앞서 2주간 연수를 갔을 때 받았던 말라위의 좋은 인상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나는 말라위로 돌아가 우선 현장의 목소리를 많이 들었다. 버섯 농가 사람들은 양송이버섯을 기르고 싶어 했다.
양송이버섯은 아프리카대륙에서 생활하는 유럽과 미주 사람들이 선호하는 식재료이자 서양 요리에 가장 많이 쓰이는 버섯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라위에서는 양송이버섯 재배가 어려워 대부분을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에서 수입했고 가격대도 높게 형성돼 있었다. 만약 우리가 말라위에서 양송이버섯을 재배하는 데 성공한다면 농가에 큰 소득 증대원이 될 수 있었다. 물론 말라위의 환경은 양송이버섯을 재배하기에 특히 까다로웠다. 하지만 나는 강한 열정과 승부욕을 느끼며 양송이버섯 재배에 도전했다.
말라위를 포함한 중남부아프리카에서 양송이버섯 재배가 어려운 이유는 종균을 생산할 시설이 없기 때문이다. 양송이버섯 종균을 구하려면 남아공에 위치한 세계적 종균업체 ‘실반(Sylvan)’을 통해 구매해야만 하는데 가격이 만만치 않다. 게다가 최소 주문수량도 있었으며 배송비도 상당했다. 그리고 종균을 수입하더라도 배지를 만들고 종균을 접종해 배양하는 과정이 어려워 성공 확률이 낮았다. 연구소에는 우리나라에서 기증한 첨단장비들이 있었으나 전기가 오락가락했기 때문에 설비를 활용하더라도 일정한 환경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나는 여태껏 학교에서 배운 지식과 기술 그리고 연수로 익힌 경험을 총동원해 한번 도전해보기로 결심했다. 남아공에서 종균을 주문하면 수월했겠지만 견적서를 받아보니 금액이 꽤 부담스러웠다. 나는 과감히 종균을 구입해 쓰는 것을 포기하고 슈퍼마켓에서 파는 양송이버섯에서 종균을 추출해보기로 했다. 물론 난이도가 높아 성공하기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연구원들은 모든 기술과 노하우를 총동원해 심혈을 기울이며 종균이 다른 미생물로부터 오염되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했다. 나 역시 지도교수님께 연락해 의견을 구했고 연구소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특히 재배사를 새로 설치할 때 연구소 사람들의 의견을 많이 반영했다. 수많은 노력들이 합쳐진 덕분이었을까, 우리는 놀랍게도 첫 시도에 100kg의 양송이버섯을 수확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말라위에 위치한 국제적인 호텔브랜드의 관계자들이 찾아와 납품해달라고 부탁했다. 농가에서도 ‘종균을 팔아달라’, ‘기술을 알려달라’며 찾아왔다. 양송이버섯 수확에 성공하자 누구보다도 현지 농민들이 가장 기뻐했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나와 우리를 반겨줬다. 성공적인 재배를 기념해 몇 시간씩 춤추고 노래하며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어려운 여건을 극복해 성과를 이뤄내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며 스스로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굿네이버스에서는 내가 봉사 기간을 1년 연장하길 바랐지만 그때 이미 나는 더 높은 목표를 세운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