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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5 [아프로37]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아프리카의 내일을 발견하다 - 이재훈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학 교수 [월드코리안신문]

관리자 / 2022-08-25 오후 5:06:00 / 1651

‘Af-PRO’는 국내 아프리카 전문가들의 모임이다. 외교부 한·아프리카재단에서는 이들의 활동을 소개한 책을 두 권 펴냈다. ‘Af-PRO, 한국과 아프리카를 잇다’는 제목의 단행본들이다. 한·아프리카재단의 허락을 받아, 이 책의 내용을 연재한다.[편집자주]

말라위 모교 교실을 방문한 이재훈 교수
말라위 모교 교실을 방문한 이재훈 교수

이재훈 교수는 어려서부터 호기심이 풍부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이민을 간 남부아프리카의 말라위는 이재훈 교수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모든 것이 새로웠던 아프리카대륙에서 이재훈 교수는 현지 학생들과 함께 맨발로 학교를 다니며 말라위 고유의 전통문화를 접했다. 그렇게 낯선 문화에 녹아들면서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력과 자신감을 키워 글로벌 시티즌으로 거듭난 이재훈 교수는 미국과 중남미, 아프리카를 누비며 국제개발협력에 관한 역량을 쌓았다. 

그리고 지난 과거 개발도상국에서 압축성장한 우리나라의 역사를 기반으로 아프리카 현지에서 그동안의 지식과 경험을 발휘했다. 에티오피아에서 대규모 산업단지의 마스터플랜을 감독하고 케냐의 디지털미디어시티(Digital Media City)를 조성하였으며 새마을운동중앙회 성과관리위원으로서 아프리카의 식량부족 및 빈곤문제 해결에도 기여했다. 다양한 분야에서 국제개발협력 활동을 이끈 이재훈 교수는 무엇보다 국제개발협력을 대하는 근본적인 마음가짐과 자세를 강조한다. 

가난에 허덕이던 우리나라가 선진국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국제원조가 있었음을 강조하며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탕으로 개발도상국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국제개발협력 활동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함을 말한다. 국제개발협력 분야를 포함하여 정치·경제 분야에 있어 세계적인 석학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겸손한 자세로 개발도상국을 대하는 이재훈 교수는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 학술적 영역과 실제 현장을 오가며 밝은 내일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나를 글로벌 시티즌(Global Citizen)으로 키워준 말라위

나는 유년 시절을 아프리카대륙에서 보냈다.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버지를 따라 말라위로 이민을 갔다. 아버지는 아무래도 사춘기에 접어든 내가 갑작스럽게 주변 환경이 바뀌는 것이 걱정되었는지 내가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국제 학교에 입학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유난히 겁이 없고 호기심이 왕성했던 나는 말라위라는 새로운 세상이 궁금했다. 그래서 현지인들이 다니는 학교에 다니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낯선 이국땅에 가서도 내 호기심은 잦아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발동이 걸렸다. 

레바논 AUT 대학원 제자들과
레바논 AUT 대학원 제자들과

직접 몸으로 부닥치며 아프리카와 말라위를 이해하고자 한 내 의지를 끝내 아버지는 꺾지 못했다. 나는 현지 학생들과 맨발로 학교에 다녔다. 이리저리 동네를 휘젓고 다니면서 외국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내밀한 지역 문화를 엿보기도 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무당과 같은 사람을 만나 샤머니즘 의식을 구경하고 전통방식으로 약을 제조하는 모습 등 그동안 타지인들이 접할 수 없었던 기상천외한 것들을 보고 배웠다. 그렇게 나는 아프리카대륙의 말라위 곳곳을 누볐고 현지 고등학교를 졸업한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다.

나는 어린 시절 말라위의 낯선 문화에 깊이 녹아든 덕분에 외국에서도 잘 적응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 대한 호기심과 도전정신도 키울 수 있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성인이 된 후에도 나의 인생 전반에 걸쳐 영향을 주었으며 세계 여러 나라를 누비는 글로벌 시티즌으로 거듭나게 하였다. 한편 미국으로 건너가 클레어몬트대학교 대학원(Claremont Graduate University)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교수 생활을 하던 중 대학원에서 친하게 지낸 레바논 출신의 동문이 레바논의 발라만드대학교(University of Balamand) 학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뜻밖에도 내게 교수 자리를 제안하며 함께 갈 것을 권했다. 나는 기꺼이 받아들였고 또다시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 레바논에서 3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서 교수 생활을 하던 중 그동안 쌓은 경험과 지식을 우리나라 청년들에게도 전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다시 한국으로 향했고 지금은 한국외국어대학교 강단에 서고 있다. 이처럼 말라위에서 처음 시작한 글로벌 마인드는 내 삶의 원동력이 되었고 글로벌 시티즌으로서 전 세계를 누빌 수 있게 해주었다.

아프리카대륙에 맞는 개발협력사업을 펼치다

한국에 머무르며 다양한 원조 사업에 관여하고 참여했다.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이야기하자면 에티오피아에 대단위 산업단지 세 곳의 마스터플랜을 세우는 데 있어 프로젝트 매니저 역할을 했다. 볼레레미(Bole Lemi), 킬린토(Kilinto), 디레다와(Dire Dawa)가 바로 그것이다. 국내 엔지니어링 컨설팅기업과의 컨소시엄을 통해 세 차례에 걸쳐 입찰에 성공했고 세계은행(World Bank)의 기금을 지원받았다. 이는 우리가 원조 사업을 진행한 경험이 많은 영국이나 미국 등과 경쟁할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갖췄음을 시사했다. 

킬린토산업단지
킬린토산업단지

그러나 마스터플랜을 실행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가 처음부터 들어간 것이 아니라 시공 단계에서 사업이 재검토되며 그 시점부터 개입한 것이다. 현지 설계팀이 작업한 볼레레미의 경우, 산업단지 내에 어떤 회사가 들어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셰드(Shed) 즉, 공장 건물의 윤곽을 모두 획일적으로 지어 버렸다. 회사 업종에 따라 활용하는 기자재가 다르고 기자재에 따라 건물의 윤곽이 달라져야 함에도 이러한 사항들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쉬운 점이 많이 남았다. 그 후 킬린토 산업단지의 마스터플랜을 수립할 때는 처음부터 내가 직접 나섰다. 산업단지가 조성된 후 입주할 회사가 업무 특성에 맞게 건물을 설계할 수 있게끔 설계방향을 잡았고 적극적으로 노하우를 알려줬다. 

그렇게 킬린토 산업단지는 셰드 없이 전기, 상하수도 등 인프라 위주로 설치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훗날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참석하기 위해 에티오피아를 다시 찾았을 때 킬린토에 잠시 들렀다. 나는 당시 시공이 끝나기 전에 귀국하여 최종 결과물을 보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킬린토의 공장 건물 외관들은 모두 제각각이었고 우리 의견이 잘 반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입주한 기업들도 크게 만족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에티오피아 정부가 우리의 제안을 잘 받아 들여줬기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뿌듯한 마음에 킬린토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한 장 남겼다.

한편, 재작년에는 케냐의 기술혁신도시 콘자(Konza)에 DMC를 조성하는 사업에 프로젝트 매니저로 참여했다. 이는 우리나라 기획재정부의 경제발전경험공유사업(KSP: Knowledge Sharing Program)의 일환으로 진행되었고 아프리카대륙의 첫 번째 DMC 사업이었다. 케냐 정부는 이 사업에 크게 만족하였고 텔레비전 뉴스에서도 연일 한국과 DMC 사업에 대한 보도가 쏟아졌다. 콘자DMC는 현지 제도를 잘 이해하고 반영한 국가원조사업의 성공 사례로 손꼽힌다. 

우리나라의 산업단지와 케냐 등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의 산업단지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그 점을 잘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산업단지 조성에 필요한 토지를 한국산업단지공단이 판매하는 반면, 케냐 등 아프리카 국가에서는 토지를 국가로부터 임대한다. 국가 차원의 ‘토지공개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는 대신 국가로부터 임대하는 것이다. 아프리카대륙에 진출한 정부기관이나 기업들이 혼란을 겪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토지공개념 제도에 익숙하지 않아서이다. 

케냐국영TV(KBC)방문
케냐국영TV(KBC)방문

개인이 임대권을 판매할 수 있지만, 사유화할 수는 없으며, 거래 시에도 까다로운 조건이 뒤따른다. 그 지역 입장에서 토지는 제한된 공급자산으로 정부가 관리하는 공공재에 해당한다. 현지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우리의 잣대로 이해하고 해석하려고 하는 탓에 실수를 범하고 일이 크게 틀어지는 경우를 많이 목격했다.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특정 지역의 법제도, 문화, 역사 등을 두루 파악하고 있는 지역 전문가가 꼭 필요한 이유다.

아프리카대륙에서 발견한 새마을운동의 가치

새마을운동은 국내에서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측면이 있다. 이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새마을운동을 정부가 주도했다고 여긴다. 새마을운동의 정신은 근면, 자조, 협동이며, 그 중 협동은 농경사회에서 시작한 나라에는 모두 남아 전해져왔다. 따라서 새마을운동은 민관이 공조하여 성공시킨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아프리카 국가들 역시 새마을운동에 관해 연구하고 자국에 적용하고자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그중 부룬디가 대표적이다. 부룬디에는 우리나라의 ‘품앗이’, ‘두레’와 같은 개념의 마을전통이 있다. 

우리나라의 새마을운동중앙회는 전통으로만 남아 있던 이 협동방식을 부룬디 현지에서 제도화하는 데 성공했다. 새마을운동중앙회는 부룬디 지역 곳곳에서 새마을운동이 활성화되도록 현지 마을 지도자들을 교육했다. 점점 마을 단위를 넘어 지역 단위로 새마을운동의 효과가 나타나자 부룬디 대통령은 관련 직속 부서를 개설했으며, 새마을운동을 새로운 국가 발전 정책으로 채택하였다. 부룬디처럼 민간이 우선 참여하고 그다음에 국가가 개입해 정부 차원의 제도로 발전시킨 과정은 새마을운동의 발전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우리나라는 1972년에 기존 벼를 품종 개량한 ‘통일벼’를 만들어냄으로써 식량생산성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 통일벼의 등장으로 우리나라의 쌀 생산량은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새마을운동에도 탄력이 붙었다. 통일벼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한국전 전후 줄곧 기아에 시달렸던 우리 국민들은 배고픔에서 벗어나게 됐다. 나는 이러한 한국의 성공 사례를 토대로 <아프리카 농업 가치사슬 분석과 한국의 농정경험을 활용한 정책제안>이란 제목으로 보고서를 썼다. 이는 아프리카대륙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쓴 보고서 중 가장 큰 반향을 일으켰다. 

부룬디 새마을회 간부진
부룬디 새마을회 간부진

아프리카개발은행(AfDB: African Development Bank)가 추진 중인 식량자급 프로젝트 ‘Feed Africa’에 보고서 내용이 상세 분석되어 활용되었고, 아프리카 여러 국가의 미곡생산 증가를 위한 전략 및 실행계획 수립에 실증적인 선험자료로 활용되었다. 실제로 아프리카대륙은 현재 서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주식이 카사바에서 쌀로 바뀌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수천만 톤의 쌀 수입으로 외화지출을 늘리는 것보다 직접 재배하는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프리카 국가에서도 새마을운동을 확산시킨다면 아프리카대륙의 고질적인 기아문제를 해결하고 역내 개발협력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이외에도 새마을운동은 아프리카 여러 국가에서 다양하게 활약하고 있다. 6, 70년대 농촌의 금융 소외문제를 해결하고자 시작된 ‘새마을금고’는 오늘날 개발도상국의 금융포용성 증진을 위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던 중 2018년에 동부아프리카 우간다에 첫 새마을금고를 설립했다. 현재는 꾸준히 지점 수를 늘려 15개 지역에서 빈곤감소와 소득증대에 기여하고 있다. 

나아가 올해는 새마을금고의 영구법인등록을 마쳤고 우간다 새마을금고중앙회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새마을운동중앙회의 성과관리위원인 나는 새마을운동을 통해 아프리카 국가들의 국제개발협력을 돕고 있다. 그리고 그동안의 노력을 인정받아 2019 글로벌 새마을지도자 포럼에서 행정안전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나는 그 속에 열심히 했다는 칭찬보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에 새마을운동과 함께 개발협력 분야를 더욱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다.

국제개발협력의 근본적인 마음가짐과 자세

과거,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며 공부하고 가르친 모든 과정의 중심에는 국제개발협력이 있었다. 학부 시절, 한때 중남미에서 가장 부강했던 아르헨티나가 근 50년 만에 빈국으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았다. 몰락해버린 아르헨티나를 보며 정치·경제적 배경과 국제개발협력 방안을 연구하고 싶었으나 당시 한국에는 자료도 부족했고 깊이 있는 연구가 어려웠다. 

온두라스 새마을운동 현지방문조사
온두라스 새마을운동 현지방문조사

그런데도 어떻게든 연구해보려 한 나의 열정을 높게 평가했는지 한 교수가 미국 클레어몬트대학교 경제학과의 야체크 쿠글러(Jacek Kugler) 교수를 소개해주었다. 덕분에 나는 쿠글러 교수와 짧은 면담을 가질 수 있었고 한 국가의 흥망성쇠에 있어 정치?경제상황과 국가개발정책방향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이를 계기로 학부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클레어몬트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정치와 국제정치경제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나는 학생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안목을 키우고, 지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도록 국제개발협력을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우리나라도 어느덧 선진국 반열에 오르면서 국제개발협력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많은 사람들이 이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는 상당히 고무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점도 있다.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활동하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왜 다른 나라의 개발을 도와야 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왜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일하고 싶어하는지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가장 중요한 목적과 동기는 사라진 채 당장 필요한 실무기술들만 배우기에 급급하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에서 나는 경종을 울리고자 국제개발협력 수업 첫 시간에 항상 학생들에게 ‘찢어지게 가난하다’라는 말의 유래를 아는지 물어본다. 사실 이 표현은 우리나라 5, 60년대 보릿고개 시절을 표현한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찰흙을 경단처럼 둥글게 뭉쳐 먹으며 주린 배를 채웠다. 

먹을 당시에는 속이 든든하겠지만 흙이 어떻게 소화가 되겠는가. 몸 밖으로 배출할 때가 되면 장이 파열되고 항문이 찢어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표현이 생겨난 것이다. 50년 전 한국전에 참전한 에티오피아 군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지구상에 이렇게 가난한 사람이 있었느냐며 돌아가는 길에 학교와 고아원을 세워줬다. 그들의 도움 없이 오늘날 우리가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었을까?

5, 60년대를 겪지 않은 세대는 배고픈 과거를 모른다. 또 이 시대를 관통한 세대라 하더라도 풍요로운 나날 속에서 과거를 잊어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고속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국제원조가 있었다. 한때 우리 정부 예산의 50% 이상이 해외원조로 이뤄졌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한국은 누구보다 개발도상국의 입장을 잘 헤아리고 공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하지만 현재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은 국제개발협력에 대한 공감대가 결여된 것 같은 인상을 종종 받는다. 

우리가 어디서부터 출발했는지 모른 채 국제개발협력을 기술적으로만 접근하고 가르치려 한다. 국제원조를 받던 개발도상국의 역사에서 비롯되는 공감대와 대상지역에 대한 이해 없이 사업계획서 쓰는 법, 사업계획서가 외교부에서 국무조정실, 국회를 거쳐 기재부로 전달되는 과정 등 실무기술을 배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무의미해 보인다. 국제개발협력 활동가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 역할을 정확히 알기 위해 우리나라 역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 과정을 통해 공감대가 자연스럽게 형성될 뿐만 아니라 원조 사업에 힘써야 하는 이유도 터득하게 되리라. 

또한 사업을 현지에서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지역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워 외부로부터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어디인지 정확히 아는 동시에 그들의 마음을 얻는 일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오늘은 미래와의 대화인 동시에 과거와의 대화다. 어제를 모르고야 오늘을 알 길이 없으며, 어제와 오늘을 알면 내일은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개발도상국에서 시작하여 압축성장을 이룬 우리야말로 아프리카와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노하우를 전수할 수 있다. 단, 힘들었던 과거를 공부하고 인정하는 과정을 통해 낮은 자세를 갖는 것이 전제됐을 때 말이다.

아프리카연합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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