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203 [아프로26] 젬베와 함께 새로운 음악인생을 걷다 [월드코리안신문]
관리자 / 2022-02-03 오후 3:08:00 / 1879이영용 바라칸(Barakan) 음악감독은 어려서부터 음악에 푹 빠져 살았다.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한 이영용 음악감독은 정작 졸업 이후에는 음악을 내려놓았다. 치밀하고 한편으론 집요한 성격을 가진 이영용 음악감독은 작곡을 공부하며 그 속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했고, 그 과정에서 음악이 더 이상 즐겁지 않게 여겨졌다. 음악과 담 쌓고 고향에 정착해 살던 중 우연한 기회에 드럼서클을 발견했다. 여럿이 야외에 모여 타악기를 연주하는 드럼서클을 보며 그는 음악이 이렇게 자유롭고 즐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드럼서클에 매료되어 전 세계에서 열리는 워크숍을 쫓아다니며 젬베(djembe)라는 악기를 알게 됐다.
하늘을 찢을 듯 쩌렁쩌렁하고 까랑까랑한 소리에 그는 강한 끌림을 느꼈다. 현존하는 최고의 젬베 연주자인 마마디 케이타(Mamady Keita) 선생을 쫓아 그의 고향인 기니에서 열리는 워크숍에도 참여했다. 이영용 음악감독은 젬베를 배우며 우리가 여태껏 서양의 관점에서 음악을 이해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 넓은 지구에서 한쪽에 편향된 관점으로 음악을 소비했다는 생각에 큰 아쉬움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젬베를 젬베가 가진 고유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아프리카 사람들의 시선으로 아프리카 음악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이영용 음악감독은 젬베가 다른 문화를 존중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동시에 아프리카를 바로 보게 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음악의 순수한 즐거움에 눈뜨다
평생 음악을 좋아했다. 흔한 표현이지만, ‘Music is my life’ 즉, 음악이 내 인생 전부였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며 생명줄 같던 음악을 놓았다. 작곡을 전공하면서 너무 지친 까닭이었다. 음표 하나 그리는 데에도 스스로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아야 하는 성격이다 보니 피로감이 가중됐다. 음악이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다 내려놓고 고향으로 내려가 정착했다. 어느 날 아내가 첫째 아이를 위한 음악 프로그램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처음 드럼서클의 존재를 알았다. 사람들 여럿이 야외에 모여 타악기를 연주하는 모임인 드럼서클을 처음 본 순간 속이 후련해지는 것을 느꼈다. 음악을 그만둔 후 느낀 좌절감과 아쉬움, 서러움 등 가슴을 짓누르던 체증 같은 감정들이 한 번에 쑥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쉼표 하나 찍는 일에도 의미를 부여했을 정도로 스스로를 지독히 옭아맸던 나로서는 음악을 저렇게나 자유롭게 연주하고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놀라웠다. 아이를 위해 찾은 드럼서클에 도리어 내가 푹 빠졌다. 드럼서클 영상을 반복하여 보다 보니 그 속에 늘 등장하는 악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드럼서클 영상을 보며 후련한 해방감을 느낀 이유는 사람들이 음악을 즐기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특히 쨍하게 시원한 소리를 내는 그 악기의 영향이 컸다. 경쾌하면서 날카롭고 쩌렁쩌렁하며 까랑까랑한 소리를 내는 악기의 정체가 몹시 궁금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젬베’라는 악기라고 했다. 당시에는 국내에 젬베라는 악기가 들어와 있지 않았다. 나는 해외 사이트를 통해 어렵게 젬베를 손에 넣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악기 중에서도 타악기를 가장 선호하지 않았다. 음악에 심취해 잘 감상하다가도 드럼이 개입하는 순간 드럼 세트의 소리가 음악을 너무 단순화하는 듯해 감흥이 깨지곤 했다. 그런 내가 젬베를 끼고 살았다. 교재를 구입해 혼자 타법을 익혔다.
평생의 스승을 만나다
내가 드럼서클의 존재를 처음 안 것은 1999년의 일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드럼서클을 직접 보고 그들 속에 섞이기를 염원했다. 하지만 드럼서클의 본고장인 미국에 가는 일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쉽지 않았다. 2002년 비로소 기회가 찾아왔다. 나는 젬베를 이고 미국에서 열리는 드럼서클 워크숍에 참여했다. 사람들 대부분이 나와 같이 젬베를 가지고 왔다. 참가자들이 전 세계 다양한 타악기 중 젬베를 선호하는 이유는 다른 타악기가 10개씩 붙어도 젬베의 까랑까랑한 소리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젬베는 드럼 세트를 스틱으로 치며 연주했을 때와 음량이 엇비슷할 정도로 울림이 크다. 그렇다고 무겁고 큰 드럼 세트를 이고 다닐 수 없으니 사람들은 젬베를 선호했다. 그런데 드럼서클 워크숍을 쫓아다니며 나는 서양 사람과 아프리카 사람이 똑같이 젬베를 쳤을 때 소리나 리듬이 굉장히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어떻게 왜 다른지를 설명하거나 이해할 방법은 알지 못했다. 내가 그 차이를 집요하게 파고들자 워크숍에 참여한 사람들이 마마디 케이타 선생을 찾아가보라고 조언했다. 기니 출신인 마마디 케이타 선생은 현존하는 가장 훌륭한 젬베 연주자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나는 선생이 매년 일본의 이오지마 섬에서 젬베 워크숍을 개최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생각보다 가까이에서 그를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나는 이오지마에 있는 젬베 학교에 전화해 짧은 영어로 워크숍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첫 해에는 고대하던 마마디 케이타 선생을 만나지 못했다. 선생이 건강상의 이유로 그 해 불참했기 때문이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이듬해에도 문을 두드렸고, 결국 마마디 케이타 선생을 만났다. 마마디 케이타 선생의 연주를 눈앞에서 처음 보고 들으며 나는 영혼이 사로잡힌 듯한 착각이 들었다. 신들린 연주는 물론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에서 영적인 기운마저 느껴졌다. 나는 워크숍에서 선생이 매년 겨울마다 선생의 고향인 기니에서 한 달 동안 워크숍을 연다는 소식을 접하고 주저하지 않고 선생에게 참여해도 될지를 물었다. 선생은 한참동안 나를 응시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해 겨울 곧장 기니로 향했다. 기니행 비행편이 출발하는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는 나처럼 젬베를 든 사람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그 중에는 이오지마 워크숍에서 만나 안면이 있는 사람도 있었다. 오로지 젬베를 배우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모인 사람들 틈에 껴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 가슴은 두방망이질했다. 나는 워크숍이 시작되기 전주 금요일에 기니에 도착하여 주말에 멀뚱히 있었는데 기니 친구들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자기들끼리 젬베를 치러 가려고 하는데 함께 갈지를 물었다. 나는 솔깃하여 “젬베 좋지”라며 호기롭게 따라 나섰다. 30여 분을 걸어 해변에 당도했다. 어떤 악기를 연주할지를 묻는 질문에 나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젬베 하러 왔는데 당연히 젬베를 쳐야지”라고 답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대서양을 바라보며 평생 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아프리카 기니에서 현지인들과 젬베를 연주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감흥을 잔뜩 끌어올려 연주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 다음 순간 뭔가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들의 속도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죽기 살기로 손을 놀렸으나 5분도 채 되지 않아 체력이 방전됐다.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부끄러우면서도 당황스러웠다. 2002년부터 국내에서 드럼서클 워크숍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2004년부터는 젬베폴라(djembefola), 즉 젬베 연주자로 활동했다. 나름대로 견고히 다져왔다고 여긴 경력이 5분 만에 파도의 포말처럼 산산이 부서져 버린 듯해 참담했다. 그리고 마음이 한없이 겸허해졌다.
젬베의 본고장에서 초심을 돌아보다
초심자의 마음으로 워크숍에 임했다. 아니, 실제로 마음의 여유를 부릴 새가 전혀 없었다. 선생이 리듬을 시연하며 가르쳐주면 그것을 따라 연습해야 하는데, 아무리 집중해도 선생이 가르쳐준 리듬이 손에 익지 않을뿐더러 머리에도 새겨지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 학생들은 돌아가며 손을 들고 선생께 다시 한 번 시연해달라는 부탁을 거듭했다. 그 과정을 통해 나는 내가 여태까지 봐온 교재에 실린 악보들이 실제 젬베 리듬의 10퍼센트도 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서유럽 음악을 중심으로 음악을 이해해 온 것이었다. 나는 모든 음악은 악보로 표기할 수 있다고 여겼다. 마마디 케이타 선생의 수업을 들으며 어째서 여태껏 전 세계 모든 음악을 서양이 만든 체계로 이해하거나 해석할 수 있다고 여겼는지 의아했다.
모든 음악을 악보로 옮길 수 있다는 믿음은 마치 모든 언어를 한글로 표기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과 같은 착각이다. 물론 발음을 한글로 옮겨 적을 수는 있겠으나 그것은 흉내 내는 수준에 불과할 뿐, 한글로 옮긴 발음을 읽는 것은 그 언어를 제대로 발음하는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또 한글로 절대 표기할 수 없는 발음들도 있다. 그전에 만났던 젬베 선생과 달리 마마디 케이타 선생은 서양식 음악 교육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그 차이를 이해시키는 데 능했다. 우리들이 무엇을 이해하기 힘들어 하며 어떠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를 잘, 아니 훨씬 더 받아들이기 쉽게 가르쳤다. 한 달간 선생의 가르침을 들으며 공부하고 연습한 결과 그 동안 가지고 있던 젬베에 대한 궁금증을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매일을 종일 연습에 매진했음에도 젬베를 익히는 데 있어 한 달은 짧은 시간이다 보니 실력이 극적으로 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인생의 큰 깨달음을 얻었다. 기니로 오기 전, 나는 국내에서 드럼서클을 알리고 젬베 연주자로 활동하며 이것이 진정 내가 가야 할 길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었다. 전문 연주가로서 스스로의 실력에 있어서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전 세계 젬베 연주자들과 한 달간 기니에서 합숙하며 낮에는 연습하고 밤에는 젬베 공연을 보다보니 내가 가지고 있던 회의감과 의구심이 서서히 사라졌다. 평생 젬베를 탐구하고 연주하는 일이 충분히 가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동시에 젬베가 내 인생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악기라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마마디 케이타 선생은 젬베가 어렵다고 우리가 투정할 때마다 반문하곤 했다.
피아노나 바이올린과 같은 악기를 배우는 사람들은 그것으로 대학원도 가고 박사 과정도 밟으며 평생을 매달리는데 왜 젬베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지지 않는지를. 젬베 또한 여타 악기처럼 평생 동안 공들여도 높은 경지에 오를까 말까 할 정도로 어렵고 심오하며 섬세한 악기라고 선생은 강조했다. 나는 선생의 일침과 같은 말을 들으며 내가 여태껏 젬베를 연주하며 이해하지 못한 부분들이 이들의 음악을 내게 주입된 서양식 사고로 이해하고 재단하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우쳤다. 젬베에는 그만의 고유한 방식이 있으며, 아프리카 사람들의 문화는 온전히 그 사람들의 시선으로 들여다봐야 진정으로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을 그제야 깨달았다.